[화성=남정훈 기자] 한국 배구를 대표하는 ‘명장’ 김호철(70) 감독이 IBK기업은행을 떠난다. 시즌 전 가장 강력한 우승후보로 꼽혔던 IBK기업은행이지만, 토종 주포 이소영의 불의의 부상과 수술 선택으로 인한 시즌 아웃, 아시아쿼터로 영입한 킨켈라의 부상으로 인한 기량 저하 등으로 팀 성적이 최하위로 곤두박질치자 김 감독이 성적부진을 이유로 자진 사퇴를 결심했다. 김 감독이 이끄는 IBK기업은행은 22일 화성종합체육관에서 열린 2025~2026 V리그 여자부 현대건설과의 2라운드 홈 경기에서 세트스코어 0-3으로 패했다.
김 감독은 지난 19일 도로공사와의 화성 홈 경기에서 0-3 셧아웃 패배를 당한 뒤 자진사퇴의 결심을 굳힌 것으로 보인다. 김 감독은 도로공사와의 경기를 마친 뒤 “분위기를 살리려고 열심히 해봤는데, 분위기가 안 산다. 공격에 힘을 실으면 리시브가 흔들리고, 리시브에 힘을 실으면 공격이 안 된다”라면서 “누가 들어가고, 누굴 기용하고 그런 문제가 아닌 것 같다”며 힘든 심경을 토로했다.
올 시즌 IBK기업은행이 그린 밑그림은 개막 전만 해도 완벽해보였다. 지난 시즌에도 최고 수준의 외국인 선수로 활약했던 빅토리아 댄착(우크라이나)와 재계약에 성공한 가운데, 아시아쿼터 슬롯에 1m91의 신장과 공격력이 돋보이는 알리샤 킨켈라(호주)를 영입해 공격의 세기를 더했다. 두 외국인을 동시에 기용했을 때 다소 흔들릴 수 있는 수비는 공수겸장의 아웃사이드 히터 이소영과 현역 최고 리베로 임명옥을 통해 갈음할 수 있다는 계산이었다. 세터진도 현역 시절 최고의 세터로 활약했고, 남자 프로배구에서도 권영민, 최태웅 등 당대 최고 세터를 지휘했던 김 감독의 조련 아래 김하경과 최연진, 박은서가 돌아가면서 평균 수준만 해주면 워낙 빼어난 공격진을 앞세워 메울 수 있다는 그림이었다. 그러나 이 밑그림에 색칠을 하기 위한 필수 선결조건 중 하나였던 이소영의 시즌 아웃 부상으로 로스터의 밸런스가 깨졌다. 여기에 킨켈라도 비시즌 동안 당한 부상으로 인해 장점인 공격력은 잘 발휘가 되지 않고 코트 위에 서면 아쉬운 수비력만 부각됐다. 대표팀을 다녀오며 한층 더 기량이 업그레이드되어 KOVO컵에서 코트를 폭격했던 육서영도 상대 서버들의 목적타 타겟이 되면서 장점인 공격력도 어그러졌다. 팀내 아웃사이드 히터 중 수비력에 방점이 찍힌 유일한 자원인 황민경은 전위에서는 생산력이 떨어졌다. 공격을 강화시키기 위해 킨켈라, 육서영을 내세우면 수비력이 떨어지고, 수비력을 올리기 위해 황민경을 투입하면 공격력이 떨어지는 딜레마에 빠진 것이다.
결국 밑그림 자체가 어그러져버린 IBK기업은행은 첫 8경기에서 1승7패로 최하위에 빠지면서 김 감독은 현장의 수장으로서 성적부진의 책임을 스스로 지겠다고 마음먹었다.
2021~2022시즌 도중 IBK기업은행이 겪은 내홍 및 항명사태를 수습하기 위한 구원투수로 사령탑에 부임한 김 감독은 다섯 시즌 째인 2025~2026시즌에 물러나게 됐다. 다섯 시즌 동안 팀 로스터를 변화시키고, 팀 체질 개선을 위해 많은 노력을 기울였지만 IBK기업은행에게 봄 배구를 선서하지는 못하고 팀을 떠난다. 남자 프로배구 무대에서는 현대캐피탈의 두 차례 챔피언결정전 우승을 이끌었지만, 여자 프로배구에서는 불명예 퇴진을 하게 됐다. 현대건설전을 마치고 패장 인터뷰가 사퇴 전 마지막 인터뷰가 됐다. 김 감독은 “오늘까지인 거 같다. 오늘을 마지막으로 IBK기업은행의 사령탑 자리를 내려놓고 밖에서 우리 선수들이 열심히 잘 할 수 있도록 바깥에서 기도하며 응원하겠다”라고 사퇴의 변을 남겼다.
김 감독은 “연패를 거듭하면서 고민을 많이했다. 구단과 조율도 했다. 구단에서는 만류했지만, ‘이건 아닌 거 같다, 분위기를 바꿔야할 것 같다’라는 마음에 결정을 내렸다. 팬들게 다시 부활하는 IBK기업은행을 만들겠다고 약속했는데, 약속을 못 지킨 것 같아 죄송스럽다”라고 밝혔다. 이어 “우리 선수들에게 ‘힘든 감독 만난서 고생을 많이 했다’라고 말해주고 싶다. 이번 계기를 통해 다시 거듭나는 팀이 되길 바란다”라고 덧붙였다.
화성=남정훈 기자 che@segye.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