우리 사회는 합리적인가? 합리적인 정부란 무엇일까? 이 질문의 핵심은 합리성을 어떻게 이해하느냐에 달려 있다. 정책평가의 권위자 도널드 캠벨은 실험하는 사회를 제시하며 경험적증거와 데이터를 활용해 사회문제를 체계적으로 해결해 가는 사회가 합리적이라고 규정했다.
하지만 현실 행정은 캠벨의 이상과 거리가 있다. 정책은 본질적으로 하나의 가설임에도 행정 현장에서는 실패에 대한 두려움과 정치적 책임 부담으로 이 가설을 제대로 검증하려는 시도가 드물다. 단순히 공무원의 실험정신이 부족하다는 식의 비판으로는 문제를 해결할 수 없다.
예산 낭비를 막으면서도 실험이 가능한 면책 장치와 독립적 평가를 할 수 있는 제도적 장치가 있어야 정책실험이 공허한 슬로건에 그치지 않는다. 영국은 2010년대 초반부터 행동 통찰팀(Behavioral Insights Team)을 운영하며, 세금 납부나 에너지 절약 정책을 실제 시민들을 대상으로 실험해 정책 효과를 정량적으로 검증했다. 미국 역시 연방정부 차원에서 증거기반정책 결정법을 통해 정책 시행 전후 데이터를 공개하고 민간 연구기관이 결과를 검증하도록 했다.
반면 우리나라에서는 여전히 시범 사업이 형식적 절차로 전락하는 경우가 많다. 교육, 복지, 부동산 등 핵심 영역에서 실험적 접근이 시도되었지만, 실패하면 정책 혼선으로 공격받고 성공해도 정권이 바뀌면 단절된다. 정책실험의 지속성을 담보하기 위해서는 정권을 초월한 데이터 축적 시스템과 독립적 평가기관이 필요하다. 이는 정책실험의 정치화를 막고 행정의 일관성을 높이는 최소한의 안전장치다.
증거에 기반하여 정책을 만드는 것은 맞다. 그러나 정책의 합리성은 단순한 수치나 데이터에만 있지 않음에 주의해야 한다. 사회적 가치, 국민 정서, 세대 간 이해관계 등 정치적·도덕적판단 요소도 함께 고려되어야 한다. 예컨대 교통 효율성을 높인다는 명분으로 버스 노선을 대폭 조정했다가 지역 노인층의 이동권을 침해한 사례처럼, 경제적 합리성만을 좇는 기술 관료적 접근은 오히려 사회적 갈등을 키울 수 있다.
실험 정부를 강조할 때 간과하기 쉬운 또 하나의 함정은 정부 중심주의다. 정부가 모든 실험의 주체가 되면, 정책실험이 관료적 절차나 시범 사업 남발로 변질될 수 있다. 중앙정부 주도의 실험보다 민간, 지방정부, 시민사회가 함께 참여하는 분권형 실험 생태계가 필요한 이유다. 핀란드는 지방정부와 시민단체가 공동으로 시행한 기본소득 실험을 통해 정부 주도의 시범 사업보다 훨씬 높은 사회적 수용도를 얻었다. 우리 역시 중앙정부의 눈치를 보지 않고 지방정부나 민간이 자유롭게 정책실험을 할 수 있는 정책 샌드박스형 제도가 필요하다.
합리적인 정부는 데이터를 숭배하는 정부가 아니라, 데이터를 도구로써 현명하게 활용할 줄 아는 정부다. 정책의 합리성은 실험의 횟수가 아니라 현실적 효과와 국민의 신뢰로 평가되어야 한다. 실험정신이 행정의 효율성과 책임성을 해치지 않는 균형점을 찾을 때, 우리 사회는 비로소 진정한 의미의 합리성을 향해 나아갈 수 있을 것이다.
오철호 숭실대 행정학부 명예교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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