스타트업의 자금줄 역할을 하는 국내 벤처캐피털(VC) 업계에 '부익부 빈익빈' 현상이 심화되고 있다. 금융권의 안전자산 선호 심리가 맞물리면서, 출자자(LP)들의 자금이 검증된 대형 VC로 몰리고 있어서다. 업계에선 이 같은 자금 양극화가 초기 스타트업 생태계의 다양성과 혁신을 해칠 것이란 우려가 나온다.
펀드 결성 늘었지만…대형사 편중 심화3일 한국VC협회에 따르면 올해 3분기까지 누적 벤처펀드 결성 규모는 전년 동기 대비 17.3% 증가한 9조7219억원으로, 2022년 이후 감소하던 펀드결성이 처음으로 반등세로 전환했다. 출자자 중 민간 부문이 전체의 83%를 차지하며 펀드결성 상승세를 견인했고, 연기금·공제회의 출자가 역대 최대인 8370억원을 기록했다.
다만 3분기까지 결성된 펀드 수는 602개로 지난해 동기(617개) 대비 2.4% 줄면서, 결성금액의 상승세와 대조를 보였다. 펀드당 평균 규모가 커졌다는 의미다. 전체 벤처투자사는 지난해보다 1개사 감소한 248개사로 나타났다. 이 기간 6개 업체가 신규 등록됐고, 7개 업체가 말소됐다.
구태훈 미네타브룩벤처스 대표는 "신규 등록은 줄고 말소는 늘어나는 'VC 옥석가리기'가 진행 중"이라며 "회수(엑시트) 시장이 막힌 상황에선 정부 자금이 아무리 많이 풀려도 작은 VC들까지 수혜를 다 보긴 어렵다. 역사가 오래된 VC들이 유리한 구조"라고 진단했다. 국내 중견 VC인 A사의 대표는 "VC 간 펀드레이징 경쟁이 더 치열해졌다"며 "시장이 좋을 때는 대형사들이 '대형 리그'에서 놀았지만, 지금처럼 매칭이 어려울 땐 소형 펀드 리그까지 내려와 경쟁한다"고 설명했다.
위험가중자산(RWA) 강화 규제로 금융권의 보수적인 출자 기조가 심화된 점도 VC 양극화에 불을 지폈다. LP들이 건전성 관리를 위해 대형 VC 위주로 자금을 집행하는 경향이 커졌기 때문이다. 소형 VC인 B사 대표는 자사 대비 규모가 큰 VC와 공동운용(Co-GP)을 구성해 출자 사업에 나섰지만, 결국 올해 GP(운용사) 선정에 모두 실패했다. 그는 "RWA 관리 강화 이후 금융권이 안전을 최우선으로 여기면서, 업력이 짧은 VC로서 생존 방안에 대한 고민이 많아졌다"고 토로했다.
"VC 다양성 줄면 벤처투자 생태계도 고착화"
내년 대규모 자금이 풀려도 상황은 녹록지 않다. 모태펀드 출자를 받은 뒤 민간 자금을 추가로 모아야 하는 '매칭' 단계에서 막히기 때문이다. A사 대표는 "모태펀드에서 40~50%를 출자받더라도 나머지 자금을 은행 등에서 매칭해야 하는데, 은행들이 내년 출범할 '국민성장펀드' 등에 자금을 대느라 개별 VC 펀드 매칭에는 소극적일 가능성이 크다"며 "LP들 입장에선 이중으로 돈을 대야 하는 것에 나름의 부담이 있을 것"이라고 설명했다.
문제는 VC 다양성의 퇴색이 초기 스타트업의 위기로 이어질 수 있다는 점이다. 대형 VC는 상장(IPO)이 임박한 후기 기업에 투자하려는 경향이 강한 반면, 혁신적인 기술을 가진 초기 스타트업 발굴은 주로 특색있는 소형 VC들이 담당해왔기 때문이다.
구태훈 대표는 "VC도 각자의 색깔이 강한 중소 하우스들이 그 성격에 맞는 펀드를 운용하는 게 이상적"이라고 짚었다. 그는 "초기 기업 투자는 결국 '골목 상권'과 비슷하다. 임대료가 오르면 개성 있는 맛집은 사라지고 대형 프랜차이즈만 남는 '젠트리피케이션'처럼, 벤처투자 시장도 대형사 위주로 투자 재원이 쏠리면서 초기 기업을 발굴하던 특색 있는 소형 하우스들이 설 자리를 잃고 있다"고 말했다.
한 벤처투자 업계 관계자는 "많은 VC가 시리즈A 초기투자를 전문으로 한다고 주장하지만, 실상은 LP의 지속적인 관심을 끌기 위해 운영자금을 키우는 데 급급해한다"며 "무엇보다 LP들도 그런 방식으로 돈을 준다. 이러한 구조에선 VC들이 검증된 내용을 토대로 대규모 투자를 진행하는 그로스캐피털에 가까워질 수밖에 없고, 모험자본의 역할은 축소된다"고 지적했다.
"'중소형', '시장실패 구간'에 더욱 집중해야"이에 따라 공제회 등 주요 LP들이 '중소형 VC 전용 출자 리그'(루키 리그)를 대폭 늘려야 한다는 주장에 힘이 실린다. 실제로 과학기술인공제회(과기공)는 올해 하반기 정기 출자 사업에서 약 6년 만에 루키리그를 부활시켜 신생·중소형사의 참여 기회를 열어 줬다. 과기공은 VC 부문에 1400억원을 배정해 대형 리그에 300억원씩 3개사, 중형 이하에 150억원씩 3개 사를 선정했다. VC 루키는 50억원을 출자할 1곳을 선정했다.
최근 '생산적 금융투자' 확대를 발표한 금융지주사들이 역할을 해야 한다는 목소리도 나온다. 대규모 펀드 조성도 중요하지만, 소형 VC 리그에 일정 자금을 배정함으로써 초기 기업 투자의 마중물 역할을 해야 한다는 것이다.
한재준 인하대 글로벌금융학과 교수와 김현열 한국금융연구원 연구위원은 최근 하나금융연구소 라운드테이블에서 "국내 VC 시장은 정책금융에 대한 의존도가 아직도 높다"며 "반면 연기금·공제회의 출자 비중은 3% 수준에 불과해 미국(42%)·유럽(12~18%)과 격차가 크다"고 지적했다.
그러면서 민간의 역할 강화와 정책금융을 통한 창업초기기업·지역산업지원 등 '시장실패 구간'에 더욱 집중해야 한다고 제안했다. 이를 위한 과제 중 하나로, 정책자금 성과평가체계가 투자 규모 중심보다는 '정책목표 부합도'와 '기업 성장 기여도' 중심으로 개편돼야 한다고 강조했다.
김대현 기자 kdh@asiae.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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