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서울의 주택공급 문제는 집값 폭등기 단골 메뉴이자 선거철 단골 이슈다. 집값은 오르고 '공급 부족'이라는 인식은 고정화돼 있다. 정부나 후보자들이 내놓는 숫자 중심의 '공급 확대' 약속은 국민들에게 기대와 불안을 동시에 가져다준다.
'몇만 가구, 혹은 몇십만 가구 공급' 약속에 시민들은 머릿속에 곧바로 새 아파트가 지어질 장면을 떠올린다. 현실에선 대부분 아직 땅도 갈리지 않은, 행정 절차 단계의 수치가 공식 '공급 물량'에 포함된다. '정비구역 지정' '사업계획 확정'과 같은 단계는 실제로 입주가 가능한 물량이 아님에도 흐릿한 현실적 공급의 상징처럼 통용된다.
집값이 급등하는 국면에도 정부의 정책 수단은 비슷하다. 주택가격 폭등이 사회적 불안으로 번질 때마다 정부는 대규모 공급대책을 발표한다. 정부의 공급대책 역시 선거철 공약처럼 구체적 숫자와 장밋빛 전망을 내세운다. 하지만 실제로 정책이 작동하는 과정은 다르다. 특히 서울의 주택공급 대부분을 차지하는 재개발·재건축은 안전진단, 정비구역 지정, 추진위·조합 승인, 시공사 선정, 사업시행인가, 관리처분, 착공·준공까지 10년이 훨씬 넘는 시간이 필요하다.
실제로 서울시가 신속통합기획 등을 통해 재개발·재건축 구역지정 기간을 3년 정도나 단축했지만 성과(입주)가 나타나려면 여전히 많은 시간이 필요하다. 그래서 집값이 오를 때 쏟아지는 '숫자'의 실제 효과는 단기 체감과는 거리가 멀다. 단기 집값 안정이나 표심을 얻기 위해 정부와 정치권이 제시하는 공급 계획은 실체와 괴리가 크다. 선거철의 공급 공약과 집값 급등기의 정부 공급대책 모두 표면상으론 효과적인 정책으로 보이지만 실제 주택 시장에는 즉각적 공급 효과를 주지 못하는 경우가 대부분이다.
이런 현상은 공급 숫자가 '정치 언어'로 변질될 때 심화한다. 구체적인 숫자가 제시되지만 그래서 그 약속은 공허하다. 공급 목표치는 구체적 수치만으로 대중 심리를 움직인다. 정책 신뢰를 높이고 불안한 시장을 잠시 안정시키기도 한다. 그러나 정치적 수사가 남발될수록 정책 신뢰의 기반은 약해지고 주택 시장은 기대와 불안 사이를 반복하며 가격 변동성이 커진다.
정책 효과가 진실로 나타나려면 실현 가능성과 일정, 그리고 체감 가능한 공급을 분명히 구분해야 한다. 입주 가능 물량과 행정 절차 단계의 공급을 분리해 설명하는 것도 필수적이다. 최소한 '착공 기준' '분양 기준' '입주 기준' 등 구체적 약속을 명시해야 대책이나 공약의 신뢰성이 생긴다.
더 나아가 제대로 된 정책이라면 단기 체감물량과 장기 계획 공급물량을 구분해 '3년 내 입주 5만가구, 5년 내 분양 10만가구, 10년 내 사업 추진 20만가구'와 같은 구체적 일정을 제시해야 한다. 이는 정치적 언어에서 행정적 투명성으로 나아가는 전환점이기도 하다.
그런 측면에서 이번 9·7 부동산대책에서 '5년간 수도권에 매년 27만가구씩 주택을 착공하겠다'고 해 주택 공급 기준을 '착공 기준'으로 제시한 것은 그나마 구체적이고 양심적이다. 공급 기준을 명확하게 제시하지 않으면 과정을 평가하거나 결과를 검증할 수 없다.
최근 서울시의 사례처럼 공급 숫자를 제시(재개발·재건축을 통해 5년간 24만가구 공급)해 놓고 당초 약속이 '구역 지정 기준'이었다고 한다면 결과적으로 시민들을 희망고문 한 것이 된다. 서울에서 5년 동안 새로 24만가구가 입주할 것이라고 믿었다면 그것 또한 순진한 일이다. 착시를 없게 해야 합리적인 의사결정이 가능하다.
김민진 기자 enter@asiae.co.kr