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조경란의얇은소설] 지금 같이 있는 사람과

글자 크기
[조경란의얇은소설] 지금 같이 있는 사람과
가족·친구, 살면서 만나는 이들 모두 ‘수천년 기도’의 인연 아닐까 대화 단절로 ‘과거’가 되지 말고 귀하고 아름다운 ‘현재’를 보내자
이윤 리 ‘천 년의 기도’(‘천 년의 기도’에 수록, 송경아 옮김, 학고재)

베이징에서 태어난 이윤 리는 과학자가 되기 위해 미국으로 유학 갔는데 아이오와대학 ‘작가 워크숍’에서 글쓰기 재능을 발견했다. 과학자의 길을 접고 작가가 되기로 했을 때 많은 사람이 그녀에게 왜 힘든 길을 가냐면서 말렸다고 한다. 영어로 쓴 첫 소설집 ‘천 년의 기도’로 이윤 리는 여러 문학상과 큰 찬사를 받았다. 십삼사 년 전쯤 소설집 두 권이 국내에 소개됐을 때도 화제가 되었고. 그 후 소식이 없었다가 올해 산문집이 출간됐는데 자신이 오래 앓아온 마음의 병에 대해 아름답고 진솔한 문장으로 기록하고 있었다. 산문집을 쓴 이유는 자신의 삶과 세계를 견뎌냈다고, 언젠가 ‘친구’에게 말할 수 있게 되기를 바라서.
조경란 소설가 단편 ‘천 년의 기도’의 아버지 시씨는 이혼한 딸이 힘든 시기를 건너고 있다는 걸 알아차리곤 생일을 핑계로 잠시 미국으로 지내러 온다. 로켓 공학자로 일했던 시씨는 기밀이라는 이유로 당에서 시키는 대로 아내나 딸에게 자신의 이야기를 할 수 없었다. 딸도 세상을 떠난 아내처럼 조용하고 이해심 깊고 착한 소녀, 착한 여자로 자라는 것 같았는데 오랜만에 만나고 보니 다른 사람처럼 느껴졌다. 도서관의 동아시아 부문 사서로 일하는 딸이 퇴근해 오면 먹이고 싶어서 시씨는 기도하는 마음으로 정성껏 음식을 만들지만 딸은 매일 더 적게 먹고 더 조용해질 뿐이었다. 시씨는 딸에게 조심스럽게 말했다. “행복한 사람은 그렇게 조용하지 않은 법”이라고.

아침마다 시씨는 공원에서 퇴직자 주택에 사는 한 노부인을 만난다. 두 사람 다 영어가 서툴러서 각각 중국어, 페르시아어로 간단히 대화하는데 제대로 이해하진 못해도 서로가 이야기하고 있다는 기쁨을 느낄 수는 있다고 시씨는 느꼈다. “이 가을 햇빛 속에 앉아 이야기할 기회를 가진다는 것은 얼마나 대단한 일인가” 하는 생각도. 시씨는 부인에게 중국 속담을 들려주었다. “修百世可同舟 修千世可共沈, 누군가와 같은 배에 타고 강을 건너는 인연에는 삼백 년의 기도가 필요하다는 말이 있습니다. ” 자신들이 만나서 이야기하는 인연도 그렇고 모든 관계에는 이유가 있다고. 부모와 자식, 친구, 마주친 낯선 이들, 사랑하는 사람들, 아버지와 딸. 이건 아마도 삼천 년의 기도가 필요한 일일 거라고.

어느 날 저녁을 먹다가 딸과 아버지 사이에 서로 숨겼던 비밀이 밝혀진다. 딸의 이혼 사유와 아버지가 평생이 아니라 삼 년 동안만 로켓 공학자로 일할 수 있었고 나머지 세월은 연구실에서 허드레 업무만 맡아야 했던 진실이. 시씨는 “평생 재난을 맞이할 때마다 침착을” 지켰고 딸 앞에서도 그러고 싶었다. 다시 아침의 공원. 노부인이 낙엽이 든 양동이를 들고 와선 이파리 하나를 자신에게 건넸다. 그는 그 잎을 열심히 들여다보았다. 시씨는 “세계”를 그렇게 자세히 들여다본 적이 없었다. 그러자 다시 말하고 싶어졌다. 이야기는 흔한 일이지만 사람들은 언제나 이야기하고 싶어 한다고, 자유롭게 이야기하며 느끼는 자유로운 감정과 서로의 마음이 닿는다는 기쁨에 대해서.

과거에 대해 말하지 않았고, 이야기하기를 금지당해서 그게 하나의 습관으로 자리 잡은 시씨가 오늘 아침 이 공원에서 알게 된 것은 무엇인가? 그는 고개를 끄덕였다. 옆에 앉아 자신에게 보라고 “완벽한 금빛 은행잎을 햇빛에 들어 올리고 있는” 소중한 친구와 지금 이 순간, 현재를 살아야 한다는 것을.

그제 나는 한 선배를 만나 산책하고 저녁을 먹었다. 어제는 이번 학기가 같이 보내는 마지막 수업이라는 걸 알지 못하는 학생들과 소설 이야기를 나누었고, 오늘은 어머니와 굴김치와 시금치나물로 점심을 먹으며 너무 오른 물가 걱정을 했다. 진짜 해야 할 얘기는 미룬 채. 나는 그들과 있었고, 이제 과거가 된 그 현재를 보냈다. 아직 충분히 이야길 나누지는 못했지만. 지금 같이 있는 사람은 누구인가? 그와 이야기를 나누며 귀하고 아름다운 ‘현재’를 보내면 어떨까. 모든 관계에는 이유가 있고 이야기를 나눌 수 있는 시간은 다시 돌아오지 않을지 모르니까.

조경란 소설가


HOT 포토

더보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