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칠레 미야후(Millahue)의 숲에는 오랫동안 아무 기록도 남지 않은 땅이 있다. 나무는 그 자리를 비켜섰고, 뿌리는 늘 그 앞에서 방향을 틀었다. 땅 아래에서는 단층이 교차하고, 수맥은 쉼 없이 진동한다. 비어 있지만 비어 있지 않은 그곳은 보이지 않는 것들이 끊임없이 흐르는 자리다.
비냐빅(Vina VIK)은 그 땅을 빈 공간이 아닌 이미 완성된 구조로 읽었다. 그리고 그 위에 점토 암포라를 반쯤 묻었다. 자연이 이미 가지고 있던 질서를 그대로 통과시키는 방식으로 와인을 맡겼다. 이곳에서 와인은 만들어지는 것이 아니라 통과된다.
비냐빅의 수석 와인메이커 크리스티안 발레호(Cristian Vallejo)는 "우리는 와인을 만들기보다 와인이 지나갈 통로를 정리할 뿐"이라고 말한다. 미야후에서 와인은 결과물이 아니라 하나의 흐름이 지나간 흔적에 가깝다. 인간은 그 흐름을 바꾸지 않고, 단지 병이라는 형태로 고정할 뿐이다.
황금의 골짜기, '미야후'
노르웨이 출신 억만장자 알렉산더 빅(Alexander Vik)은 2000년대 초 남미 전역을 돌며 와이너리 부지를 찾았다. 남미에서 세계 최고의 와인을 만들겠다는 목표 아래 그들은 포도 재배학자와 지질학자, 기후 전문가, 와인 컨설턴트 등 대규모 전문가 집단을 꾸려 최적의 부지를 찾아 나섰다. 그들의 시선 끝에 닿은 곳이 바로 미야후였다. 비냐빅이 자리한 미야후는 칠레 중부 카차포알 밸리(Cachapoal Valley) 안쪽 깊숙한 곳에 있다. 원주민 언어로 '황금의 땅'이라는 뜻을 지닌 이 계곡은 수천 년 동안 거의 손대지 않은 자연 지형을 유지해 왔다.
알렉산더 빅은 미야후 일대 약 4300헥타르(ha)의 부지를 통째로 매입했다. 하지만 이 가운데 실제 포도밭으로 사용하는 면적은 약 300헥타르에 불과하다. 나머지 90%는 숲, 호수, 초지, 야생동물 보호구역으로 남겨두었다. 비냐빅이 말하는 떼루아는 포도밭만이 아니라 그 포도밭을 둘러싼 전체 생태계를 포함하기 때문이다.

미야후의 기후는 태평양과 해안산맥의 영향을 동시에 받는다. 아침이면 차갑고 무거운 해풍이 계곡을 타고 올라와 포도밭을 감싼다. 하지만 밤에는 급격히 기온이 하강해 낮의 열기를 식히고 산도를 붙잡는다. 이로 인해 포도 숙성은 언제나 느리고 안정적이다.
이곳의 토양은 약 1억년 전 형성된 고대 지층이다. 풍화된 화강암과 점토, 자갈이 겹겹이 쌓여 배수가 뛰어나고 뿌리는 깊게 내려간다. 포도는 얇은 표층이 아니라 훨씬 깊은 시간의 결을 흡수한다. 지형은 복잡하다. 산맥과 계곡이 맞물리며 고도, 경사, 방향이 구획마다 다르게 나타난다. 햇빛의 양과 각도, 바람의 방향, 토양 수분은 포도밭 안에서도 미세하게 달라진다. 비냐빅은 이 각각의 구획을 독립된 성격으로 관리한다.
식재 밀도는 이례적일 만큼 높다. 하지만 생산량 확대를 위한 밀식은 아니다. 오히려 줄기 하나에 포도송이 하나만 남기고 모두 제거하는 방식으로 수확량을 극단적으로 줄인다. 포도 한 송이에 당분과 산미, 수분을 농축시켜 응축도를 끌어올리기 위해서다. 수확된 포도는 네 차례 이상 선별을 거치며 전체의 약 15%는 양조 전 단계에서 제외된다. 집중도와 밀도를 얻기 위한 선택이다.
크리스티안 발레호, 샤토 마고에서 미야후로
포도를 재배하던 부모 아래에서 자란 크리스티안 발레호에게 와인은 늘 곁에 있던 일상의 일부였다. 1990년대 중반 칠레 마이포 밸리의 와이너리 '운두라가(Undurraga)'에서 경력을 시작한 그는 탱크를 씻고 포도를 나르고 밤새 발효 상태를 확인하며 양조의 기초를 몸으로 익혔다. 이후 칠레 가톨릭대에서 포도 재배학을 공부하며 품종과 토양의 관계를 공부하며 이론적 기반을 쌓았다.
전환점은 프랑스 보르도(Bordeaux)였다. 그는 '샤토 마고(Chateau Margaux)'를 비롯해 생줄리앙(Saint-Julien)과 생테스테프(Saint-Estephe), 생테밀리옹(Saint-Emilion)의 여러 와이너리에서 일하며 보르도식 양조의 핵심을 체득했다. 강함보다는 균형과 집중도, 여운의 길이를 중시하는 감각은 이 시기에 완성됐다. 이후 이탈리아, 스페인, 미국까지 건너가 다양한 산지의 와인을 직접 만들며 경험을 축적했다.
2007년 그는 컨설턴트의 소개로 알렉산더 빅 부부를 만났고, 첫 방문에서 미야후의 토양과 지형, 기후를 단번에 이해했다. 당시 미야후는 와이너리가 전무한, 말 그대로 미개척지였다. 하지만 발레호는 "그 땅에는 이미 모든 조건이 갖춰져 있었다"며 "인간이 할 일은 그 잠재력을 훼손하지 않고 꺼내는 것뿐이라고 느꼈다"고 회상했다. 그날 이후 비냐빅의 모든 와인은 그의 손을 거쳐 만들어졌다.
통제 대신 순환…'바루아·암포아·플레루아'비냐빅의 양조 철학은 '순환'이라는 단어로 요약된다. 자연에서 빌리고, 다시 자연으로 돌려보내는 구조다. 이 철학은 '바루아(Barroir)'와 '암포아(Amphoir)', '플레루아(Fleurroir)' 세 가지 개념으로 구체화된다.

칠레의 많은 와이너리들은 프랑스 오크통을 사용한다. 발레호는 이 점이 늘 마음에 걸렸다. 칠레 와이너리가 프랑스 오크를 사용한다는 건 결과적으로 칠레 와인에 프랑스의 풍미를 입히는 것이기 때문이다. 이런 이유로 비냐빅은 완성된 오크통을 들여오지 않는다. 프랑스에서 선별한 오크 판재를 사용하지만 토스팅은 미야후 숲에서 자연적으로 쓰러진 떡갈나무를 땔감으로 삼아 진행된다. 300년 이상 인근 숲에서 살아온 나무가 품은 열과 연소의 성질이 배럴의 미세 구조에 입혀지는 것이다.
비냐빅은 쿠퍼리지(Cooperage·오크통 제작소)를 직접 운영하며 오크통에 칠레의 풍미를 입히고 있다. 토스팅 방식은 세분화돼 있어 와인과 구획에 맞춰 다르게 적용된다. 테루아(Terroir)와 배럴(Barrel)을 합쳐 '바루아'라는 개념을 만든 이유도 여기에 있다. 오크 자체의 향을 덧입히기보다 테루아의 성향을 배럴에 먼저 입히는 방식이다.

두 번째 축은 암포라(Amphora)와 테루아의 합성어인 암포아다. 비냐빅은 포도밭 인근에서 발견한 고밀도 점토로 직접 암포라를 빚는다. 높이 약 2m의 암포라는 서서히 굽고, 일정한 열을 유지하며 수주에 걸쳐 완성된다. 구워진 점토는 미세한 공기 흐름을 허용해 오크통과는 전혀 다른 방식의 산소 교환을 만든다. 암포라 숙성은 과실의 선명함과 산도, 흑연·미네랄 계열의 텍스처를 강조한다. 비냐빅의 여러 와인에 부분적으로 적용되고 있으며, '스톤빅'은 이 암포라를 100% 사용하는 프로젝트다.
플레루아는 '꽃(Fleur)'과 테루아를 합친 말로 포도밭 외부 자연까지 양조에 끌어들이는 개념이다. 비냐빅 부지에는 70여 종의 야생화가 자생하는데, 이 중 향을 강하게 남기지 않으면서 효모 밀도가 높은 12종의 꽃만 선별해 발효에 사용한다. 꽃은 건조 후 다시 불려 포도즙에 투입된다. 잎이나 잔디보다 수백 배 많은 야생 효모가 이 꽃에서 추출된다. 꽃을 딴 자리에는 미리 모아둔 씨앗을 다시 뿌린다. 자연에서 얻은 것을 자연으로 되돌리는 구조다. 플레루아는 향기를 더하기 위한 장치가 아니라 야생 효모를 통해 테루아의 미시적 생태계를 그대로 포착하려는 시도다.
플래그십 '빅'…구조의 중심축비냐빅을 대표하는 와인은 '빅(VIK)'이다. 와이너리의 이름을 그대로 붙인 이 플래그십 와인은 프로젝트 전체의 방향성을 가장 명확하게 보여준다. 초기 빅은 카베르네 소비뇽(Cabernet Sauvignon)과 카베르네 프랑(Cabernet Franc), 카르메네르(Carmenere), 시라(Syrah), 메를로(Merlot) 등 다섯 품종을 사용한 전형적인 보르도 스타일 블렌드였다. 하지만 시간이 지나며 구성은 점차 단순화됐다. 시라와 메를로가 빠지고, 카베르네 소비뇽과 카베르네 프랑이 중심으로 남았다.

결정적인 변화는 2021 빈티지였다. 카베르네 프랑의 비율을 70% 이상으로 과감하게 끌어올린 블렌딩은 내부 블라인드 테이스팅에서 가장 높은 평가를 받았고, 와인 평론가 제임스 서클링(James Suckling)으로부터 100점을 받는 등 국제무대에서도 호평받으며 도전적인 시도가 올바른 방향으로 이뤄졌음을 입증했다.
현재 빅은 카베르네 프랑이 중심이 된 구조 위에 카베르네 소비뇽이 골격을 더하는 스타일로 만들어진다. 붉은 과실과 검은 과실, 허브와 스파이스, 흑연과 젖은 돌의 미네랄 노트가 긴장감 있게 이어지고, 타닌은 촘촘하되 둥글게 전개된다. 산도는 와인의 중심을 단단히 붙잡는다. 비냐빅이 추구하는 와인의 중심축은 항상 같다. 과도한 힘이 아니라 집중된 에너지와 긴 여운이다.
스톤빅, 땅속에서 완성되는 시간의 와인
스톤빅(StoneVIK)은 비냐빅이 2018년부터 축적해 온 '순환 와인 메이킹'의 실험을 하나의 와인으로 집약한 결과물이다. 바루아, 암포아, 플레루아라는 세 개의 개념이 개별적으로 작동하는 단계를 지나 비로소 하나의 완성된 구조로 통합된 와인이 바로 스톤빅이다. 비냐빅이 "우리가 자연과 맺는 관계의 최종 형태"라고 부르는 프로젝트이기도 하다.
출발점은 미야후 깊숙한 라 로블레리아(La Robler?a) 숲에서 발견된 하나의 빈터였다. 사방은 수백 년 된 떡갈나무로 빽빽한데, 유독 그 자리만은 원형으로 나무가 자라지 않았다. 발레호는 처음 그 자리에 섰을 때 공백이 아닌 보이지 않는 긴장감 같은 것을 먼저 느꼈다고 말했다. 지질학적 조사를 거친 결과, 이 지점은 두 개의 단층이 교차하고 그 사이로 지하수맥이 흐르는 구조였다. 수맥의 흐름은 미세한 진동을 만들고, 이 진동이 지표까지 전달되는 자리였다. 나무가 뿌리를 깊게 내리지 못하는 이유도 바로 이 지속적인 미세 진동 때문이었다.

비냐빅은 이 지질학적 '결절점' 위에 14개의 암포라를 반쯤 묻었다. 배열도 우연에 맡기지 않았다. 남반구의 태양 궤적, 하지와 동지의 일조 각도, 그림자의 이동 경로를 계산한 뒤 스톤헨지 구조에서 착안한 원형 배열로 배치했다. 14개라는 숫자 또한 임의가 아니다. 7은 비냐빅이 우주와 자연의 순환을 상징하는 숫자로 해석하는 기본 단위이고, 이를 하늘과 땅의 구조로 한 번 더 겹친 결과가 14개다.
암포라는 지표 위가 아니라 숲의 뿌리 층과 직접 맞닿는 깊이에 묻혀 있다. 그 위로는 떡갈나무의 뿌리, 균류의 네트워크, 미생물 층이 얇게 겹쳐 있다. 암포라는 그 모든 층과 접촉한 상태로 계절의 온도 변화, 지하수맥의 진동, 습도와 압력의 미세한 차이를 동시에 받아들인다. 인위적인 온도 조절, 공기 주입, 진동 장치는 전혀 사용하지 않는다. 와인은 오직 지질과 시간의 조건에 맡겨진다.

스톤빅에는 비냐빅의 최상위 밭에서 나온 카베르네 프랑을 중심으로 카베르네 소비뇽과 소량의 카르메네르가 블렌딩된다. 수확은 항상 야간에 이루어진다. 낮의 열기를 피하고, 포도의 자연 산도를 최대한 보존하기 위한 선택이다. 포도는 먼저 비냐빅이 직접 토스팅한 바루아 배럴에서 1차 발효를 거친다.
이후 발효가 안정화되면 와인은 암포라로 옮겨져 땅속 숙성 단계로 들어간다. 암포라 숙성은 평균 8개월가량 진행된다. 비냐빅이 이 기간을 중요하게 여기는 이유는 '개월 수'가 아니라 '꺼내는 시점'에 있다. 스톤빅은 반드시 남반구의 하지에 맞춰 암포라에서 꺼내진다. 태양이 가장 높은 각도로 숲을 통과하며 암포라 위에 가장 긴 에너지 그림자를 남기는 시점이다. 숙성의 종료는 달력이 아니라 태양의 위치가 결정한다.

이 과정에서 스톤빅은 배럴 숙성과는 전혀 다른 질감으로 완성된다. 암포라의 미세한 기공 구조는 오크보다 느리지만 더 직접적인 산소 교환을 만들어 낸다. 그 결과 스톤빅의 타닌은 조밀하면서도 둔중하지 않고, 질감은 부드럽지만 팽팽한 긴장감을 유지한다. 흙, 돌, 흑연, 마른 허브와 함께 검붉은 과실의 농축도가 겹겹이 펼쳐지되, 어느 하나가 과도하게 튀지 않는다. 와인은 무게감보다는 깊이감으로 기억된다.
발레호는 "이 와인은 우리가 얼마나 자연을 통제했는지를 보여주는 것이 아니라, 얼마나 통제하지 않았는지를 보여주는 와인"이라고 말한다. 그에게 스톤빅은 '설계된 와인'이 아니라 '통과된 와인'에 가깝다. 숲과 땅, 물과 태양, 지질과 계절이 하나의 경로를 만들고, 와인은 그 경로를 잠시 따라 흘렀을 뿐이라는 인식이다. 인간은 그 흐름이 사라지기 전에 병이라는 형식으로 붙잡아 외부로 옮긴다. 그 병이 바로 스톤빅이다.
구은모 기자 gooeunmo@asiae.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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