일본 정부가 지고 있는 나랏빚은 선진국 중에서도 손꼽힐 정도로 많다. 지난해 말 OECD 기준으로 1212조엔, 약 1경1400조원을 넘어섰다. 국내총생산(GDP) 대비 부채비율은 227.42%로, 세계1위다. 재정 확대의 역사가 긴 미국(136.62%)이나 이탈리아(148.41%)를 뛰어넘는 것은 물론이고 국가부도 위기로 유럽 대륙을 뒤흔들었던 그리스(169.26%)의 두배 수준이다. 선진국 가운데서도 최악의 부채대국인 셈이다. 이에 비해 한국의 부채비율은 56.74%(국제 비교 기준)로 현저히 낮다. 재정당국인 기획재정부가 "한국의 부채비율이 선진국보다 낮아 아직 빚 낼 여력이 충분하다"는 취지의 주장을 펴고 있는 것도 이런 맥락에서 그럴듯하게 들린다. 그런데 과연 그럴까.
우리는 보통 얼마나 버는가를 기준으로 얼마나 쓰는가를 정한다. GDP 대비 부채비율이 227%라는 건 버는 것의 2배 이상의 빚을 냈다는 의미다. 하지만 모아둔 자산은 거의 없이 연봉 4000만원으로 살아가는 사람이 10억원의 대출을 일으킨 것과 연봉 4000만원에 순자산이 6억원 이상인 사람이 10억원 대출을 일으킨 것이 같을 수는 없다. 쌓아놓은 자산이 많으면 많을수록 빚을 크게 늘려도 덜 위험하다는 얘기다.
일본이 그렇다. 1경을 훌쩍 넘는 천문학적인 부채규모에도 일본 경제가 버티는 건 '빚을 감당할 여력'이 있어서다. 일본의 국가부채는 세계 최고 수준이지만 민간부채는 매우 낮다. 일본의 가계부채 비중은 65%에 불과하다. 세계 최고 수준의 저축률을 자랑하는 일본은 가계 순자산이 많다. 저축으로 국내 금융기관에 몰린 돈은 국고채 수요 충당에 쓰인다. 최근 외국인 투자자들이 일본 국채 보유비중을 늘리고 있다고는하지만 일본 국채의 외국인 보유 비중은 여전히 13%에 불과하다. 나머지 87%는 일본 중앙은행을 비롯해 일본 금융기관들이 들고 있다. 탄탄한 내수경제를 기반으로 민간이 막대한 나랏빚의 대부분을 흡수하고 있는 것이다. 천문학적 액수의 국채 이자비용도 결국 자국민들에게 돌아가는 구조다.
반면 한국은 GDP 대비 가계부채 비율이 90%까지 불어나 있다. 전체 민간부채 중 절반이 가계부채다. 가계부채 총량이 크고 대부분의 자산이 부동산에 묶여 있어 국민들이 국고채를 사줄 여력이 없다. 한국은 국고채의 약 4분의 1(23%, 5월 기준)을 외국인 투자자들이 들고 있다. 외국인 국채 투자는 국채통합계좌개통, 비과세 혜택 등으로 해마다 증가세다. WGBI 편입이 본격화되는 내년부터는 더 빠르게 늘어나게 된다. 최대 80조원의 자금이 국내 채권시장에 들어올 수 있다고 한다. 막대한 빚을 매년 늘려 국채를 과도하게 찍어낼 경우 국가신용등급이 내려갈 수 있다는 경고음이 끊이지 않는 이유다. 국가신인도 하락은 외국인 자본 이탈과 환율 불안을 야기하며 제2의 외환위기로 이어질 수 있다. 대외의존도가 높은 소규모 개방경제국가엔 재정건전성이 숙명인 셈이다.
게다가 한국은 비기축통화국이다. 국제사회에서 금이나 달러 같은 안전자산 위치에 있는 엔화나, 엔화로 표시돼 안전자산 취급을 받는 일본 국채와는 처지가 다르다. 기축통화국은 국채 수요가 많아 금리 상승 부담 없이 빚을 계속해서 늘릴 수 있고, 상대적으로 신용등급 강등 위험도 낮다. 채권 수요가 낮고 금리 여건이 불리한 한국과는 채무의 적정선 자체가 다르다. 이재명 정부가 최근 발표한 장기재정전망을 보면 국가부채 비율이 40년 뒤 173%까지 치솟는다고 한다. 미국을 뛰어넘어 일본의 길로 가는 것이다. 유례없이 빠른 고령화로 1970년대생의 은퇴가 본격화되는 약 15년 뒤면 재정이 손 쓸 수 없게 나빠지기 시작하며 타격이 본격화할 것이라는 경고가 잇따른다. 일본은 천문학적 부채에도 잃어버린 30년을 버텨왔지만, 한국은 섣불리 빚더미를 늘리다간 15년도 못 버틸까 걱정된다.
조유진 세종중부취재본부 차장 tint@asiae.co.kr