기사의 이해를 돕기 위해 오픈AI ‘챗GPT’로 생성한 크리스마스 케이크 이미지. 챗GPT 제공 찬 바람이 불고 거리마다 캐럴이 울려 퍼지는 때가 오면 귀갓길 시민들의 손에 들린 ‘케이크 상자’가 비로소 도심의 풍경을 완성한다. 동지에 팥죽을 먹듯 이제는 우리에게 너무나 익숙한 문화가 된 크리스마스 케이크. 그 달콤한 케이크 조각 안에는 단순한 미각적 즐거움을 넘어 인류의 수천년 제의(祭儀)적 역사와 한국 사회의 역동적인 소비문화가 층층이 쌓여 있다.
19일 관련 기록 등에 따르면 케이크의 기원은 고대 그리스와 로마의 제의 문화로 거슬러 올라간다. 고대 그리스인은 달의 여신 아르테미스에게 바치기 위해 꿀과 곡물을 섞어 만든 둥근 꿀빵 ‘플라쿠스(Plakous)’를 구웠다. 로마에서는 치즈와 밀가루, 달걀을 섞은 ‘리붐(LIbum)’을 신에게 올렸는데 ‘특별한 날, 신성한 축복을 비는 음식’이라는 케이크의 상징적 의미가 이때부터 깃들었다고 볼 수 있다.
설탕과 버터, 향신료가 금만큼이나 귀한 사치품이었던 중세 유럽으로 넘어오면 케이크의 위상은 더욱 분명해진다. 당시 약재로도 취급될 만큼 귀했던 설탕을 아낌없이 쏟아부어 만든 케이크는 가문의 풍요를 상징하는 결정체였다. 케이크를 나눠 먹는 행위는 단순한 식사를 넘어 ‘축복’을 공유하는 성스러운 의례로 받아들여졌는데, 일 년 중 가장 풍성한 크리스마스의 상징이 되면서 케이크는 단순히 배를 채우는 음식을 넘어 한 해의 끝과 새해의 시작을 잇는 매개체가 됐다.
우리나라에서 케이크가 본격적으로 대중문화의 중심에 선 것은 경제 성장의 온기가 가정마다 퍼지던 1980년대부터로 추정된다. 당시 동네 제과점의 주력 상품으로 알려진 ‘버터크림 케이크’는 그 시절 상당한 사치품이자, 가장이 가족에게 전하는 화목의 가장 완벽한 증표였다.
1990년대에 들어서며 시장은 또 한 번의 전환점을 맞이한다. 파리바게뜨와 크라운베이커리 등 대형 프랜차이즈가 전국적인 체인망을 구축하며 ‘케이크의 대중화’를 이끌었고, 묵직한 버터 대신 하얀 생크림과 신선한 과일이 올라간 ‘생크림 케이크’가 주류로 자리 잡았다. 알록달록한 케이크가 가족의 영역을 넘어 연인과 친구 사이의 필수 이벤트 아이템으로 자리 잡은 것도 이 시기다.
2000년대는 케이크의 역할과 정의가 확장된 시기다. 배스킨라빈스의 ‘아이스크림 케이크’가 대표적인 사례다. 여름 전유물이었던 아이스크림을 겨울 축제의 주인공으로 바꾼 것은 ‘계절의 경계’를 허무는 일이었고, 다양한 캐릭터로 꾸며진 케이크는 먹는 즐거움을 넘어 ‘주는 선물’로서의 가치를 극대화했다.
케이크의 가치가 맛에서 ‘비주얼’로 급격히 전이된 것은 2010년대다. 스마트폰 보급과 사회관계망서비스(SNS) 이용자 증가는 보는 즐거움을 무엇보다 중요하게 만들었다. ‘어떻게 하면 사진이 잘 나올까’를 고민하는 소비자들의 심리를 파고든 투썸플레이스의 ‘스트로베리 초콜릿 생크림’ 케이크는 압도적 비주얼을 내세워 연말 홀케이크 시장을 평정, 겨울의 스테디셀러가 됐다.
오늘날의 크리스마스 케이크 시장은 ‘사전 예약’과 ‘희소성’의 전쟁터가 됐다. 원하는 케이크를 선점하는 행위 자체가 연말을 준비하는 하나의 통과 의례가 된 셈이다. 실제로 올해 배스킨라빈스의 아이스크림 케이크 사전 예약 건수는 전년 대비 무려 185% 폭증했다. 이는 당일의 혼잡을 피하려는 실속형 소비와 함께 자신이 원하는 디자인을 확실히 소유하려는 목적 지향 소비가 정착했음을 보여준다.
MZ세대의 지지를 받는 ‘노티드’도 최근 예약 페이지가 열리자마자 주요 매장 물량이 광속으로 마감되는 사태를 빚었다. 2만~4만원대의 합리적인 가격에 독보적인 캐릭터 감성을 담은 노티드 케이크는 젊은 층에 ‘줄 서서 기다릴 가치가 있는 아이템’으로 통한다.
한쪽에서는 수십만원을 호가하는 초고가 호텔 케이크가 등장하며 양극화 현상이 두드러지기도 하지만 ‘나를 위한 확실한 보상’이라는 점에서 맥을 같이 한다. 시대에 따라 형태와 구매 방식은 달라졌지만 케이크 상자를 여는 순간 기대하는 행복의 온도는 층층이 쌓인 크림만큼이나 견고하게 유지되고 있다.
한 유통업계 관계자는 “크리스마스 케이크는 단순한 매출 품목이 아닌 한 해를 장식하는 완결품이 되고 있다”며 “시대가 바뀌어도 연말을 마무리하는 방식만큼은 이전이나 지금이나 크게 변하지 않았다고 볼 수 있다”고 말했다.
김동환 기자 kimcharr@segye.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