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기고] 요즘 성탄절 왜 캐럴이 들리지 않나요? 아기 예수의 질문

글자 크기
[기고] 요즘 성탄절 왜 캐럴이 들리지 않나요? 아기 예수의 질문
요즘 크리스마스는 있는데 캐럴은 없다. 트리는 있고 불빛은 반짝이는데, 아기 예수를 부르는 노래는 들리지 않는다. 이상한 풍경이다. 탄생을 기념하는 날에 정작 탄생을 축하하는 노래를 부르지 못하는 시대다.

노래는 원래 명령이 아니었다. 응답이었다. 아기 예수의 탄생은 처음부터 노래로 전해졌다. 천사들은 허락을 구하지 않았고, 목자들은 계약서를 쓰지 않았다. “기쁘다”는 사실 하나로 하늘과 땅이 함께 노래했다.

캐럴은 교리 이전의 감탄이었고, 신학 이전의 고백이었다. 설명보다 먼저 터져 나온 소리였다. 그래서 캐럴은 예배당보다 거리에서 먼저 울렸다.

그런데 아기 예수를 가장 먼저 찬양해야 할 곳, 교회가 가장 먼저 조용해졌다. 아무도 “부르지 말라”고 말하지는 않는다. 대신 “절차가 필요하다”, “규정이 그렇다”고 말한다. 틀린 말은 아니다. 그러나 충분한 말도 아니다. 이유는 분명하다. 결국은 저작권료 때문이다

신앙인들은 언제부터 찬양을 계산하게 되었는가. 노래를 불러도 되는지, 누가 관리하는지, 청구서가 날아오지는 않는지. 노래가 시작되기도 전에 걱정이 먼저 올라오는 사회에서 기쁨은 오래 머물지 못한다.

‘캐럴(Carol)’의 어원은 중세 프랑스어 carole에서 왔다. 원형 춤을 추며 함께 부르던 공동체의 노래였다. 무대가 없었고, 관객도 없었다. 부르는 사람과 듣는 사람이 구분되지 않는 노래였다. 그래서 캐럴은 전문가의 전유물이 아니었고, 상품으로 태어나지도 않았다. 아이도, 노인도, 음정이 틀린 사람도 함께 불렀기에 캐럴이었다.

여기서 분명히 해야 할 사실이 있다. 저작권협회는 창작자가 아니다. 권리자도 아니다. 징수자는 더더구나 아니다. 권리를 위임받아 관리하는 관리자다. 관리의 목적은 명확하다. 노래가 계속 불리도록 하는 것, 창작과 향유가 함께 살아남도록 하는 것이다. 관리의 결과가 노래의 실종이라면, 그 관리 방식은 법 이전에 상식의 질문을 받아야 한다.

크리스마스 캐럴은 특수한 문화 자산이다. 종교적 서사이자, 계절적 공공문화이다. 수십 년 이상 공동체 안에서 반복 재생된 음악이다. 문제는 이 캐럴들이 단기·비영리·공공 사용임에도 불구하고 상업적 음악 이용과 동일한 기준으로 관리된다는 데 있다. 지방자치단체는 합법을 선택해 스피커를 껐고, 교회는 분쟁 회피를 택해 찬양을 멈췄다. 그 결과, 광장도 예배당도 함께 조용해졌다.

물론 저작권은 필요하다. 창작자는 보호받아야 한다. 이 명제는 변하지 않는다. 그러나 보호의 결과가 찬양의 침묵이라면, 그 제도는 목적지에 도착하지 못한 셈이다.

허준혁 유엔 피스코 사무총장 아기 예수의 탄생을 노래하는 캐럴은 상품으로 태어나지 않았다. 수익을 위해 만들어지지 않았다. 시장보다 먼저 공동체를 만들었고, 계산보다 먼저 믿음을 불러냈다. 그런 노래를 상업적 사용과 동일한 잣대로만 다룬다면, 그것은 법의 문제이기 이전에 문화와 신앙을 이해하지 못한 결과다.

교회는 언제나 법을 존중해 왔다. 그러나 교회는 법 이전에 복음을 맡은 공동체다. 법이 노래를 멈추게 할 때, 교회는 질문해야 한다. “이 법은 무엇을 보호하고 있는가”라고. 교회가 먼저 노래하지 않는 찬양은 세상에서 살아남지 못한다. 교회가 먼저 침묵하는 순간, 세상은 노래할 명분을 잃는다.

캐럴이 없는 크리스마스는 조용하지만 따뜻하지 않다. 아이들은 가사를 잊고, 어른들은 함께 부를 이유를 잃고, 신앙은 개인의 마음속으로만 축소된다. 공동의 노래를 잃은 공동체는 공동의 기억도 함께 잃는다. 노래는 지키기 위해 멈추는 것이 아니라, 불리기 위해 보호받아야 한다. 교회가 다시 부를 때 도시는 다시 듣고, 법이 노래를 따라갈 때 크리스마스는 다시 시작된다.

아기 예수는 지금도 조용히 묻고 있다.

“누가, 왜, 무슨 권리로 내 탄생의 노래를 멈추게 하느냐”

그리고 묻는다.

“왜 너희는 더 이상 나를 노래하지 않느냐”


HOT 포토

더보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