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시시비비]韓 제조업체가 미국 투자를 망설인 까닭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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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시시비비]韓 제조업체가 미국 투자를 망설인 까닭

위성 관련 장비를 만드는 국내 벤처기업 대표는 최근 미국에 공장을 짓기로 했다. 이미 계약까지 체결했다. 이 회사는 미국 빅테크에 제품을 판매하는데, 안정적인 공급망을 갖추기 위해 현지에 공장을 지을 것을 요구받았다고 한다. 특히 지난해 12월 계엄 사태가 터진 후 현지 공장 건설 요구는 더욱 거세졌다. 끈질긴 요청에도 6개월 이상 장고를 거듭한 뒤에야 신규 설비투자를 결정했다. 회사 대표는 "고객과 시장을 바라보고 한 결정"이라고 했다.


현지 공장 설립을 두고 오래 고민한 건 단지 투자에 따른 리스크 부담 때문이 아니었다. 공장 가동에 필요한 인력을 현지에서 채용해야 하는데, 인건비 부담뿐 아니라 이들이 업무를 제대로 소화할지 여부에 확신이 없었다고 토로했다. 그는 "인건비가 우리나라의 최소 2배 이상인 데다 제조업 역사가 끊기다시피 한 미국의 상황을 고려할 때 생산성을 장담하기가 어려웠다는 점이 가장 큰 고민이었다"고 말했다.


한미 양국의 소득 차는 확연하다. 세계은행에 따르면 미국의 1인당 GNI(국민총소득)는 지난해 8만3600달러로, 우리나라 3만6000달러의 2배가 넘는다. 제조업 근로자 평균 임금도 지난달 기준 미국은 7만3760달러(약 1억원)에 달했다. 우리나라 제조업 종사자는 국가통계포털에서 분류한 기준으로 4000만원을 웃도는 수준에 그치는 것과 대조적이다.


반면 근로자의 숙련도는 떨어진다. 미국에 진출한 중국 기업의 내부 갈등을 다룬 넷플릭스 다큐멘터리 '아메리칸 팩토리'에서 현지 인력에 대한 평가는 냉정하다. 중국 경영진은 고용된 이들의 생산성이 낮다고 지적했다. 미국 노동통계국(BLS)에 따르면 대표적인 제조업인 자동차 부문 생산성은 1987~2007년까지 20년간 연평균 4.1%에 달한 반면 2019~2024년엔 -2.6%로 뒷걸음질했다. 시간당 생산집중도 역시 같은 기간 3.2%에서 1.0%로 쪼그라들었다. 1970년 이후 자본의 국경 간 이동이 자유로워지면서 제조업이 점차 미국을 빠져나가면서 산업 기반이 무너진 결과다. 세인트루이스 연방준비은행 통계를 보면 미국 내 제조업 일자리는 1979년 6월 1955만개에서 2010년 3월엔 1143만개로 줄었다. 31년 새 800만개 이상 제조 일자리가 미국에서 사라진 것이다.


그동안 미국에 시설 투자를 결정한 우리 기업들은 현지 인력 수급에 대한 불안감을 내색하지 않았다. 세계 최대시장이라는 이점만 바라보고 관세장벽 위협을 피하기 위해선 어쩔 수 없는 부분이라고 판단했기 때문이다. 공장 설립 초기 국내 인력을 보내 안정적인 가동을 확인한 후 미국 인력들을 고용해도 좋다고 본 것이다.


미국이 최근 LG에너지솔루션과 현대차가 건설 중인 공장을 급습해 불법 파견을 문제 삼자 우리 기업들은 격앙된 반응을 보였다. 그동안 우리 직원들에 대한 비자 발급 역시 까다로웠던 점을 고려하면 숙련도가 떨어지는 인력을 가동 초기부터 고용하라는 의미와 다를 게 없다. 기업으로선 받아들이기가 어려운 요구 조건이기에 결국 불만이 표출됐다.


트럼프 행정부 출범 이후 미·중 갈등이 불거지면서 신냉전은 뉴노멀이 됐다. 미 국무부 관료 출신인 에드워드 피시먼은 최근 펴낸 '초크포인트(Choke Point)'라는 저서에서 최근 상황을 동서가 냉전시대에 대치했던 것과 판박이라면서도 "트럼프 집권기엔 동서가 아닌 유럽을 포함해 적어도 3개로 갈라진다고 봐야 한다"고 적었다. 우방까지 적국으로 취급하는 어정쩡한 상황을 빗댄 것이다. 당장 미국인의 일자리를 만들겠다고 아시아 동맹까지도 회색지대로 내몰고 있다.






최일권 산업IT부장 igchoi@asiae.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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