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다자주의” 외친 시진핑… ‘글로벌 리더’ 미국의 빈자리 노린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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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다자주의” 외친 시진핑… ‘글로벌 리더’ 미국의 빈자리 노린다
2025년 국제질서 재편 속 中 전면에 WHO·기후변화협정·유네스코… 트럼프 재집권하자마자 줄이탈 中 “지원 확대” 美 공백 파고들어 美, 동맹국에도 ‘자국 우선주의’ 中 “책임 대국” “자유무역” 주창 국제 거버넌스 주도 의지 드러내 25개국 中호감도 상승세로 전환
2025년 들어 국제기구와 다자 정상회의에서 나타난 가장 뚜렷한 기류를 꼽자면, 미국의 이탈과 그로 인해 더욱 선명해진 중국의 부상이다. 중국은 그동안 기후, 보건, 개발, 기술 규범의 여러 영역에서 역할을 확대해 왔지만 중심에 있지는 않았다. 그러나 미국이 협의의 핵심축에서 잇달아 물러나면서 중국의 존재감이 전면에 부각되기 시작했다.

도널드 트럼프 미국 대통령(왼쪽), 시진핑 중국 국가주석. 로이터연합뉴스 ◆미국이 비운 리더십, 파고드는 중국

29일 외신에 따르면 지난 9월24일 유엔총회에서 미국과 중국의 대비가 분명히 드러났다. 기조연설에 나선 도널드 트럼프 미국 대통령은 “기후변화는 전 세계를 상대로 한 사기극”이라고 일갈했다. 이 발언은 각국 대표단을 얼어붙게 했다. 기후변화는 실재한다는 과학적 합의와 파리협정을 축으로 구축돼 온 국제 기후 질서의 근간을 부정하는 발언이었다. 트럼프 대통령은 집권 2기 출범과 함께 미국의 파리기후협정 재탈퇴를 선언한 상태였다.

다음 날 같은 자리에서 시진핑 중국 국가주석은 정반대의 메시지를 냈다. 그는 화상 연설을 통해 “녹색·저탄소로의 전환은 시대적 대세”라며 “일부 국가가 역행하고 있지만 국제사회는 올바른 방향을 확고히 잡아야 한다”고 미국을 간접 비판했다. 미국이 물러난 기후 거버넌스 무대의 한가운데로 중국이 들어선 장면이었다.

이 같은 구도는 올해 들어 다자 무대 곳곳에서 반복되고 있다. 트럼프 대통령은 1월 재집권 첫날 세계보건기구(WHO) 탈퇴 행정명령에 서명했다. 분담금이 비효율적으로 사용된다는 이유였다. 분담금의 약 20%를 부담하던 미국이 빠지자 WHO는 대규모 인력 감축에 들어갔다.

반면 중국은 WHO에 대한 지원을 늘리겠다고 약속했다. 류궈중 중국 국무원 부총리는 5월 스위스 제네바에서 열린 세계보건총회 연설에서 “세계는 일방주의와 힘의 정치가 초래한 심각한 도전에 직면해 있으며 이는 글로벌 보건안보에도 큰 영향을 미치고 있다”며 “해법은 다자주의에 있다. 중국은 앞으로 5년간 WHO에 5억달러(약 7176억원)를 추가로 지원할 것”이라고 밝혔다.

미국은 유네스코(UNESCO)에서도 탈퇴하고 공적개발원조(ODA) 예산도 대폭 삭감하며 문화·교육·원조 분야에서 스스로 물러났다. 이들 분야에서도 중국은 지원을 확대하며 미국의 공백을 메웠다.

지난 10월 중국 베이징 국가컨벤션센터에서 열린 ‘글로벌 여성 정상회의 2025’ 개막식에서 시진핑 중국 국가주석이 발언하고 있다. 베이징=EPA연합뉴스 ◆‘책임 대국론’ 앞세운 중국… 한계도

정상회의 무대에서도 중국이 나섰다. 지난 10월 한국에서 열린 아시아태평양경제협력체(APEC·에이펙) 정상회의에 트럼프 대통령은 불참했지만, 시 주석은 폐막식 날 인공지능(AI) 분야 협력과 자유무역·공정무역·공급망 안정 등을 촉구하는 메시지를 던져 리더십을 드러냈다는 평가다.

중국은 지난 9월에는 “책임 있는 주요 개발도상국”으로서 세계무역기구(WTO)가 개발도상국에 부여해 온 관세·보조금 특혜와 일부 기술·재정 지원을 포기하겠다고 밝혔다. ‘책임 있는 대국’은 중국이 다자주의와 개방성, 포용성을 강조할 때마다 반복해 사용하는 표현이다. 1990년대 말 등장한 책임대국론은 처음에는 기존 국제질서에 성실히 참여하겠다는 수용적 의미가 강했지만, 시 주석 집권 이후에는 중국식 세계질서를 제시하고 주도하겠다는 적극적 담론으로 진화했다.

미국이 ‘미국 우선주의’로 동맹국과의 거리마저 벌리는 사이, 중국은 유엔, 상하이협력기구(SCO), 브릭스(BRICS) 등을 무대로 다극적 세계질서를 강조하며 영향력을 확대하고 있다.

중국의 이 같은 전략은 트럼프 2기 들어 효과가 나타나고 있는 것으로 보인다. 지난 7월 미국 퓨리서치센터가 25개국을 대상으로 실시한 조사에 따르면 중국에 대한 호감도는 31%에서 36%로 상승했고, 비호감도는 61%에서 54%로 낮아졌다. 퓨리서치센터는 “중국에 대한 인식이 여전히 부정적이지만, 상승세로 돌아선 것은 2020년 팬데믹 이후 처음”이라고 평가했다.

도널드 트럼프 미국 대통령이 지난 9월 미국 뉴욕 유엔본부에서 열린 제80차 유엔총회에서 연설하고 있다. 뉴욕=AFP연합뉴스 다만 중국이 미국의 공백을 완벽히 대체하고 글로벌 거버넌스의 새로운 규칙과 규범을 만들 수 있을지는 불투명하다는 지적도 나온다. 중국이 이끄는 질서를 다른 나라들이 인정해야 가능하기 때문이다.

이정남 고려대 아세아문제연구원 중국연구센터장은 대외경제정책연구원 보고서에서 “글로벌 거버넌스의 주도는 체제를 작동시키는 가치와 규범, 규칙을 주도할 수 있을 때 가능하다”면서 “중국 공산당의 마르크스주의와 중국 전통문화에 기초해 등장할 체제가 과연 국제사회에 수용될 수 있을지에 대해 여전히 부정적인 상황”이라고 밝혔다. 이남주 성공회대 중어중국학과 교수는 “책임 대국을 자임하는 것과 실제로 그 역할을 인정받는 것은 다르다”며 “미·중 경쟁의 심화, 주변국과의 긴장, 중국의 과도한 팽창에 대한 경계가 주요 도전 요인이 될 것”이라고 말했다.

김희원 기자 azahoit@segye.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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