올해 보이스피싱 범죄 피해액은 7월 기준 8000억원으로 역대 최대치다. 올해 안에 1조원을 넘길 전망이다. 기관을 사칭하거나 악성 앱 설치를 유도하는 것은 이제 전통적 수법이다. 갈수록 대담해지는 보이스피싱 범죄의 배경에는 첨단 기술로 무장한 작전 수행 능력이 있다.
정부는 지난달 보이스피싱 근절 종합대책을 발표하면서 "보다 강력하고 근본적인" 대응을 약속했다. 이번 대책의 핵심은 예방과 선제 대응에 있다. 보이스피싱 조직의 핵심 범죄 도구인 악성 해킹 앱·대포폰을 원천 차단하고, 범죄를 24시간 감시하는 통합대응단을 출범한다. 정부부처 뿐만 아니라 민간 기업의 책임도 강화한다. 은행권의 무과실 피해자 배상 책임 법제화, 불법 대포폰을 개통한 통신사에 대한 제재안 등이 그렇다.
하지만 피해자들의 말을 들어보면 정부의 대책은 현실을 제대로 반영하지 못하고 있다. 지금의 보이스피싱 범죄는 국내외를 오가는 '초지능형' 조직범죄다. 피해자의 휴대폰에 악성 앱을 심고, 검사·형사를 사칭한 조직원이 교대로 심문하고, 우체국 집배원으로 위장해 가짜 공문서를 배송한다. 최소 10명 이상의 인력이 동원된 정교한 시나리오가 피해자의 정신을 서서히 잠식한다. 최근에는 딥페이크와 딥보이스 기술로 피해자를 속인다. 가히 첨단 기술의 경연장이다.
이 과정을 주도하는 조직 핵심은 대개 해외에 거점을 두고 움직인다. 감시망을 강화하면 국내에 있는 현금 전달책, 콜센터책 등은 검거할 수 있겠지만 조직의 말단일 뿐이다. 지난 3월 중국에 거점을 둔 보이스피싱 조직 총책을 검거하는데 5년이 걸렸다. 이들은 "안 좋은 일, 해외에서 고수익 보장한다"며 대놓고 조직원을 모집하며 세를 키운다. 경찰이 전담 수사인력을 400명 증원했지만 '유령'을 잡기엔 부족해보인다.
책임을 강화해 범죄를 예방한다는 취지는 알겠지만 은행에 책임을 떠넘기는 것처럼 보이는 '무과실 배상 책임'에도 현실성 문제가 있다. 협박 때문에 자발적으로 송금하는 피해자의 행위를 은행이 간파하고 막는 건 어려운 일이다. 무과실 배상이 고객의 경계심을 흩트려 범죄에 더 취약하게 만들 위험도 있다.
정부의 종합 대책은 늦은 만큼 반갑지만, 당장 보이스피싱에 위협받는 국민들을 보호하려면 보다 현실적인 대책이 필요하다. 기술적으로 진화하는 범죄는 기술로 막아야 한다. 통신사와 은행이 협력해 만든 영국의 '스캠 시그널'은 피해자가 범죄자와 통화 중이거나, 비정상적 네트워크가 사용되는지를 알아낸다. 범죄 조직이 근거지로 삼는 중국·태국·캄보디아·베트남 등 해외 수사당국과의 긴밀한 네트워킹을 바탕으로, AI로 무장한 범죄집단에는 AI를 방패 삼아 막아야 한다. 최근 국내 수사기관과 통신사, 기업이 AI로 보이스피싱을 사전에 탐지하고 차단하는 시스템이 개발되어 현장에 도입되고 있는 것은 반가운 소식이다.
임주형 기자 skepped@asiae.co.kr