미국은 1989년 말 조지 H W 부시 정부 시절 파나마를 침공, 군부실권자 마누엘 노리에가를 생포했다. 2만5000만명의 미군과 최신형 스텔스 전투기까지 투입됐다. 그는 한때 미국의 친구였다가 실권장악 후 반미로 돌아섰다. 그런 노리에가를 그대로 뒀다가 파나마운하를 잃을 수 있다는 우려 때문이었다. 그는 교황청 대사관에 숨었다가 2주 만에 투항했고 미 법원에서 40년형을 선고받았다.
36년이 흘러 이번에는 도널드 트럼프 대통령이 새해 벽두 베네수엘라 급습을 단행, 세상을 놀라게 했다. 미 특수부대는 지난 3일 수도 카라카스로 날아가 불과 3시간 만에 베네수엘라 니콜라스 마두로 대통령을 마약·테러 혐의로 체포했다. 마두로는 5000만달러짜리 현상금 수배범으로 전락해 수갑을 찬 채 미국으로 압송되는 수모를 겪었다. 미국이 해외 현직 국가원수까지 체포하는 건 드문 일이다.
주춘렬 논설위원 노리에가 사건과도 닮은 듯 다르다. 노리에가 작전 당시 미국은 대놓고 침공, 군사작전이라고 발표했지만 이번에는 처음부터 끝까지 미국법을 어긴 범죄자를 체포한 법 집행의 일환으로 포장하고 있다. 전후 자유주의 국제질서를 설계한 미국이 맞나 싶다. 보편적 규범이나 국제법, 타국의 주권 따위는 안중에 없다는 식이다. 이미 미국은 한 달 전 새 국가안보전략에서 서반구(미주대륙) 내 영향력 확대와 에너지 자원 장악을 공언했는데, 불운한 마두로가 새 전략의 첫 번째 희생양이 됐다. 트럼프는 마두로 축출 후 베네수엘라의 정권 이양과 석유산업 장악을 언급했다. 과거 미 기업 보유 유전 자산을 몰수한 석유산업 국유화를 ‘도둑질’이라고 몰아세우며 “1년6개월 안에 미 기업을 통해 석유산업을 재건할 것”이라고 했다. 2차 공습과 직접통치 운운하며 정권교체를 압박한다. 백악관 인스타그램 공식계정에는 트럼프 사진과 함께 ‘까불면 다쳐(FAFO·Fuck Around Find Out)’라는 비속어까지 등장했다. 미국이 새로 만든 질서를 수용하지 않거나 존중하지 않는다면 더는 용납하지 않겠다는 결기가 읽힌다.
이게 끝이 아니다. 트럼프는 다른 중남미 국가를 향해 ‘다음은 당신 차례가 될 수 있는 식’의 경고를 쏟아낸다. 콜롬비아를 ‘병든 나라’에 빗대며 군사작전 가능성을 거론하는가 하면 쿠바에 대해서도 “그냥 무너질 것”이라고 비아냥댔다. 동맹국인 덴마크를 향해서도 군사적 요충이자 자원의 보고인 그린란드가 필요하다며 무력동원에 나설 뜻을 내비쳤다. 트럼프의 ‘미국 우선주의’가 통상질서 개편을 넘어 세계 외교·안보의 지형을 뒤흔드는 형국이다.
베네수엘라에서 시작된 불길은 중남미를 넘어 아시아와 유럽으로 번질 수 있다. 당장 중국과 러시아가 반미 성향 중남미 국가를 중심으로 만들어온 패권을 미국에 선뜻 넘겨줄 리 만무하다. 외려 반미국가들이 결집하고 강대국 간 갈등도 증폭될 공산이 크다. 중국이 ‘이에는 이’식으로 대만 침공을 감행, 정권 교체에 나서지 말란 법이 없다. 북한도 중·러와 밀착하며 핵과 미사일 고도화에 속도를 내면 한반도에 군사적 긴장이 고조될 가능성도 배제될 수 없다.
잘 관리된 정원은 잡초가 무성한 ‘정글’로 변하고 있다. 자강만이 활로인 세상에서 포퓰리즘은 위험천만이다. 베네수엘라 비극은 27년간 이어진 우고 차베스와 후계자 마두로 정권의 현금살포 정책과 반미노선이 화근으로 작용했음은 누구도 부인하기 힘들다. 차베스와 마두로는 석유산업 국유화로 번 돈을 무상교육·의료, 저소득층 보조금으로 쏟아부었다. 국제유가가 급락세를 빚자 베네수엘라는 경제와 민생이 파탄된 지 오래다. 이 와중에 독재정권은 중국에 빚을 내는 대신 헐값에 석유를 넘기며 망국의 길을 재촉했다.
강 건너 불구경할 때가 아니다. 정부는 트럼프발 격변을 직시하고 외교·안보와 경제를 아우르는 국가전략을 짜야 할 것이다. 이재명 대통령은 지난해 한·미 관세협상 후 “유일한 힘은 버티는 것이었고 그 힘의 원천은 국력을 키우는 것”이라고 토로했다. 남미 사례에서 보듯 자강·자립 역량을 갉아먹는 포퓰리즘의 덫에서 벗어나지 않고는 국가 생존과 번영을 기약할 수 없음을 명심하기 바란다.
주춘렬 논설위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