더불어민주당 김병기 의원의 공천헌금 의혹이 불거진 지 열흘이 지났지만 경찰이 강제수사를 미루면서 증거인멸 우려가 커지고 있다. 앞서 서울 동작경찰서가 공천헌금 수수 내용을 담은 탄원서를 제출받고도 두 달가량 방치하며 수사를 뭉갰다는 의혹이 있었는데, 사건을 넘겨받은 서울경찰청마저 뒷북 수사를 이어가고 있다는 비판이 나온다. 핵심 당사자들이 메신저를 탈퇴하거나 휴대전화를 교체하는 등 증거인멸 정황까지 잇따라 포착되면서 이미 수사 골든타임을 놓쳤다는 지적마저 나온다.
서울경찰청 공공범죄수사대는 8일 오후 1시20분 김 의원 측에 1000만원을 건넸다가 돌려받았다는 전직 동작구의원 A씨를 피의자 신분으로 소환해 조사했다. A씨는 서울 마포구 광역수사단 청사에 도착해 “성실히 조사받겠다. 들어가서 말씀드리겠다”고만 답했다. A씨 변호인은 “탄원서 내용은 1000만원을 전달했다는 것”이라며 “탄원서 내용 외에 김병기 의원 측과 주고받고 한 것이 없다”고 했다. 경찰은 9일에도 김 의원 측에 2000만원을 전달했다고 주장한 전직 동작구의원 B씨를 조사할 예정이다.
더불어민주당 김병기 전 원내대표가 공천 헌금 관련 의혹으로 사퇴한 가운데 8일 서울 동작구 지역사무실 문이 굳게 잠겨 있다. 경찰은 이날 김 전 원내대표에게 금품을 건넸다는 탄원서를 작성한 전직 동작구의원을 소환해 조사했다. 최상수 기자 하지만 정작 의혹의 중심인 김 의원의 국회 사무실이나 자택에 대한 압수수색은 한 차례도 이뤄지지 않았다. 김 의원 소환 조사 일정도 불투명하다. 경찰 관계자는 “현재 수사 단계에서는 예정된 압수수색이 없다”면서 “김 의원의 소환 조사 여부도 확인해줄 수 없다”고 했다. 경찰 수사 대상에 오른 김 의원 관련 의혹은 이날까지 총 17건에 이른다.
이 중에서도 김 의원이 2020년 총선을 앞두고 전직 동작구의원들로부터 공천헌금을 받았다는 의혹과 무소속 강선우 의원이 김경 서울시의원으로부터 1억원을 받은 것을 김 의원이 알고 도와줬다는 의혹이 핵심으로 꼽힌다.
공천헌금 의혹은 A씨와 B씨가 작성한 탄원서 내용이 1일 언론에 공개되면서 본격화됐고, 강 의원 관련 의혹은 지난달 29일 김 의원과 강 의원 간 통화 녹취록이 공개되면서 불거졌다. 배우자 법인카드 유용, 차남 입학·취업 청탁, 쿠팡 전 대표 오찬 접대 의혹 등도 수사 대상이다.
앞서 동작경찰서는 A씨와 B씨가 작성한 탄원서를 지난해 11월 제출받고도 두 달가량 수사에 나서지 않았다. 이 탄원서는 2023년 12월 이미 당시 민주당 측에 전달됐지만 당 차원 조치도 이뤄지지 않았다. 김 의원 배우자의 법인카드 유용 의혹에서도 동작서는 지난해 4월 내사를 시작했으나 서울청이 6차례 이상 보완수사를 지시했는데도 4개월 뒤 무혐의 종결했다.
수사가 지지부진한 사이 의혹 관련자들의 증거인멸 정황은 이어지고 있다. 강 의원에게 1억원을 건넨 의혹을 받는 김경 서울시의원은 전날 오후 10시49분 텔레그램에 재가입한 것으로 확인됐다. 김 시의원은 앞서 같은 번호로 텔레그램을 사용하고 있었는데, 이 번호를 저장한 이용자들에게 신규 가입 메시지가 표시됐다. 통상 텔레그램은 탈퇴할 경우 기존 대화 메시지와 사진, 파일 등이 완전히 사라진다. 김 시의원이 메시지를 영구 삭제하기 위해 기존 계정을 탈퇴했을 가능성이 제기된다.
김 의원이 공천헌금을 받거나 돌려줄 때 중개 역할을 한 것으로 지목된 C 동작구의원 역시 최근 휴대전화를 교체한 정황이 나타났다. 애플 아이메시지 상태 등으로 미뤄볼 때 안드로이드 기반 휴대전화에서 아이폰으로 기기를 변경한 것으로 추정된다. 일반적으로 휴대전화 통신 조회가 가능한 기간은 1년이다.
김 의원 관련 사건은 2020년, 강 의원 관련 사건은 2022년에 발생해 해당 기간의 통신 내역은 존재하지 않는다. 당시 관련자 간 통화나 메시지 등을 확보하려면 실제 휴대전화나 컴퓨터를 압수해야 하는데, 핵심 인물들이 과거 기록을 지우는 상황이 벌어지고 있는 셈이다.
경찰은 이날 김 의원에게 오찬을 접대했다는 의혹을 받는 박대준 전 쿠팡 대표를 참고인 신분으로 불러 조사했다. 김 의원은 지난해 9월 국회 국정감사를 앞두고 박 전 대표를 만나 자신의 비위를 폭로한 보좌진 출신 쿠팡 인사에 대한 인사 불이익을 압박한 의혹을 받는다.
이예림·윤준호 기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