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아주사설 | 기본·원칙·상식] 약가유연계약제 확대, 신약 접근성만으로 설명될 수 없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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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주사설 | 기본·원칙·상식] 약가유연계약제 확대, 신약 접근성만으로 설명될 수 없다
정부가 13년 만에 약가 제도를 손질하며 약가유연계약제 확대에 나섰다. 신약 접근성을 높이겠다는 명분은 분명하다. 그러나 공공보험 제도의 기본 원칙과 충돌하는 지점에 대해서는 여전히 설명이 부족하다.
 
보건복지부는 국민건강보험 요양급여 기준 개정을 통해 이른바 ‘이중약가제’로 불리는 약가유연계약제의 적용 대상을 대폭 넓히겠다고 밝혔다. 외부에는 해외 주요국과 유사한 가격을 고시하되, 실제 보험 적용 가격은 국민건강보험공단과 제약사가 비공개로 계약하는 방식이다. 낮은 국내 약가로 신약 도입이 지연되는 이른바 ‘코리안 패싱’을 막겠다는 취지다.
 
문제는 제도의 핵심 전제가 ‘가격 비공개’라는 점이다. 약가유연계약제는 글로벌 제약사가 요구해온 비밀 할인 계약을 제도적으로 수용하는 선택이다. 그렇다면 그에 따른 대가와 한계 역시 분명히 설명돼야 한다. 실제 가격이 공개되지 않는 구조에서 협상의 공정성이나 건강보험 재정의 효율성을 어떻게 검증할 것인지에 대한 답은 아직 제시되지 않았다.
 
해외 사례는 이 지점에서 중요한 기준을 제공한다. 영국은 신약 접근성을 위해 제약사와 비공개 할인 계약을 허용하지만, 동시에 국가 차원의 비용 효과성 기준과 사후 평가를 엄격히 적용한다. 호주 역시 약가 협상 과정에서 비공개 계약을 활용하되, 급여 유지 여부를 정기적으로 재검증하는 장치를 두고 있다. 비공개를 허용하되, 그만큼 제도적 통제와 평가 책임을 강화한 것이다. 비공개와 무제한적 자율을 동일시하지 않았다는 점이 핵심이다.
 
시민사회가 우려하는 지점도 바로 여기에 있다. 건강사회를위한약사회와 경제정의실천시민연합은 약가유연계약제가 확대될수록 공공 재정의 집행 과정이 검증 불가능한 영역으로 들어갈 수 있다고 지적한다. 이는 단순한 운영 미숙의 문제가 아니다. 가격 비공개를 제도적으로 허용하면서도, 그에 상응하는 검증·평가 장치를 충분히 설계하지 않은 구조적 문제다.
 
적용 대상 확대 역시 설명이 충분하지 않다. 정부는 신약 접근성 강화를 명분으로 내세웠지만, 개정안에는 특허가 만료된 오리지널 의약품과 바이오시밀러까지 포함됐다. 이미 대체 약제가 존재하고 가격 경쟁이 가능한 영역까지 이중약가를 적용해야 하는 이유는 명확하지 않다. 해외 주요국에서도 비공개 약가 계약은 주로 고가 신약이나 대체 수단이 제한된 치료 영역에 한정해 활용된다. 신약 유인을 위한 예외적 제도가 제약 산업 전반의 가격 유연성 보장 수단으로 확장되는 데에는 명확한 선이 필요하다.
 
환자 단체의 우려는 구분해서 볼 필요가 있다. 약가유연계약제는 가격 결정 방식에 관한 제도이지, 의약품의 과학적 유효성 심사나 허가 절차를 완화하는 제도는 아니다. 다만 해외 사례가 보여주듯, 가격 협상의 속도가 빨라질수록 사후 평가와 급여 재조정 장치가 함께 작동하지 않으면 제도의 신뢰는 유지되기 어렵다.
 
이번 약가 제도 개편의 쟁점은 단순하지 않다. 신약 접근성을 위해 어느 수준까지 비공개를 허용할 것인지, 공공보험 제도에서 투명성과 효율성 중 무엇을 어디까지 양보할 것인지에 대한 정책적 선택의 문제다. 해외는 그 선택의 대가를 제도적 통제로 보완해왔다. 한국 역시 같은 질문을 피해갈 수 없다.
 
신약 접근성은 중요하다. 그러나 건강보험 제도의 신뢰 역시 그에 못지않다. 약가유연계약제가 또 하나의 예외로 남지 않으려면, 무엇을 얻고 무엇을 포기하는 제도인지 국민이 이해할 수 있어야 한다. 해외가 보여주는 교훈은 분명하다. 비공개는 선택일 수 있지만, 설명과 책임은 선택이 아니다. 그래픽아주경제[그래픽=아주경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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