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엄마가 아들에게 '톡'을 보낸다. "잘 지내니? 사진을 정리하다가 20년 전 바닷가에서 찍은 네 사진을 찾았어." 어린 시절 바닷가에서 알몸으로 수영하던 내 모습이 담긴 사진이다. 그 순간 휴대폰 화면에 경고문이 뜬다. "당신의 문자에 이상이 감지됐습니다. " 놀란 나는 떨리는 손으로 답장을 입력한다. "엄마, 이런 건 메시지로 보내면 큰일 나요." 아니나 다를까 잠시 후 경찰에게서 전화가 걸려 온다. "아동 성범죄 혐의 조사차 연락드렸습니다. "
이 장면이 단지 디스토피아적 상상일 뿐일까. 최근 유럽에서 논란이 되고 있는 '채팅 통제법(Chat Control)'이 실제로 통과된다면 인류가 맞이할 미래 중 하나일지 모른다. '채팅 통제법'의 정식 명칭은 '아동 성 학대 방지 및 퇴치 규정(CSA)'이다. 2022년에도 유사 법안이 발의됐지만 다수 국가의 반대로 무산됐다.
그러나 올해 7월 덴마크가 유럽연합(EU) 이사회 의장국을 맡으면서 이 법안을 우선 통과시키겠다고 선언했다. 디지털 기술을 악용한 아동 범죄가 점점 더 심화하는 만큼 불가피한 조치라는 이유였다. 이에 프랑스, 이탈리아 등 주요 국가를 포함해 무려 14개 회원국이 찬성 의사를 밝히며 논란이 더욱 커졌다.
이 법안의 핵심은 '종단 간 암호화(end-to-end encryption)'의 일부 장벽을 허물고, 개인 간 주고받는 통신 내용을 국가가 감시할 수 있게 하는 것이다. 즉 메시지를 보내거나 받을 때마다 검열 시스템이 내용을 열람하고 위험 요소를 탐지하는 방식이다.
반대 입장에서는 이를 '치명적인 빅브러더의 시작'이라 비판한다. 종단 간 암호화를 우회하도록 강제하면 모든 사적 대화가 사전 검열 대상이 된다. 범죄와 아무런 관련도 없는 일반인 메시지까지 정부나 치안 기관이 들여다보게 된다는 뜻이다.
이미 독일에서는 경찰이 메신저 통신을 가로챌 수 있게 법이 개정된 바 있다. 2021년 독일 연방의회는 경찰이 아직 혐의가 입증되지 않아 형사소송을 할 수 없는 사람들의 와츠앱 등을 감청할 수 있도록 법률을 변경했다. 만약 이런 모델이 EU 전체로 확대된다면 수많은 시민이 불필요한 의심과 조사를 받게 될 수 있다는 우려가 높다.
위험은 여기서 그치지 않는다. 암호화 장벽에 인위적인 '구멍'을 내면 테러 조직이나 외국 정보기관이 이 취약점을 악용할 수 있다. 또한 수사 과정에서 수많은 '오탐지'와 오류로 인해 실제 범죄 적발의 효율도 떨어질 수 있다. 인공지능(AI) 등 적발 보조 수단이 있다 하더라도 감시 데이터의 방대함을 고려한다면 한계가 있다.
EU 회원국들은 법안 투표를 한 달여 앞둔 지난 12일(현지시간)까지 의무적으로 찬반 입장을 표명해야 했다. 독일은 끝까지 결정을 미루다가 마감 하루 전인 11일 '반대' 입장을 공식적으로 밝혔다. 이미 채팅통제를 부분 도입한 나라이지만, 동시에 자국의 보안 기술 보호를 고려했다는 뒷말이 따른다.
어찌 됐든 이로 인해 이 희한한 법이 좌초될 가능성은 커졌다. EU는 '가중 다수결' 방식으로 법안을 결정한다. 절반 이상의 국가가 찬성하더라도 이들 국가의 총인구가 EU 전체 인구의 65%를 넘어야만 가결된다. 회원국 중 인구 규모가 가장 큰 독일이 캐스팅 보트 역할을 한 셈이다. 최종 투표는 다음 달 14일에 진행된다.
기술의 발전은 늘 새로운 범죄를 동반했고, 국가가 범죄 예방을 명분으로 국민의 자유와 권리를 제한해 왔다. 우리나라 역시 인터넷 실명제, 메신저 검열 등 유사한 시도가 여러 차례 있었다. 강력범죄는 반드시 근절돼야 하겠지만 그와 동시에 더이상 제도가 개인의 자유를 억압하는 일이 없도록 경계해야 한다. 전 세계 '동료 시민'들이 함께 막아내야 할 미래의 과제다.
박충훈 콘텐츠편집2팀장 parkjovi@asiae.co.kr