전국법관대표회의(이하 전법대) 재판제도분과위가 22일 법원 내부 통신망에 올린 상고심 연구 보고서 중 ‘분과위원회 종합의견’ 대목입니다. 분과위는 “헌정사에서 ‘상고심 충실화’를 목표로 대법관 수의 조정이나 상고심 사건 선별제도, 재판연구관 제도 등의 도입이 있어왔다”면서 “상고심 개선에 대한 논의가 반복되는 상황과 관련해서 ‘국민의 권리 구제’가 충분한지, 사법부가 국민의 신뢰를 받는 재판을 해왔는지 자성할 필요가 있다”고 밝혔습니다.
서울 서초구 대법원. 연합뉴스 그러자 법원 일각에선 “민주당이 정말 ‘상고심 충실화’와 ‘국민의 권리구제’를 위해 꺼내든 법안이라고 생각하는 거냐”라는 반박이 나옵니다. 민주당의 대법관 증원안에 대해 법조계 안팎에선 ‘사법부 장악 의도’라는 비판이 상당합니다. 과거 여러차례 비슷한 사례를 통해 그 의도와 결말을 어렵지 않게 짐작할 수 있기 때문입니다. 하버드 정치학과 교수 스티븐 레비츠키와 대니얼 지블랫은 ‘어떻게 민주주의는 무너지는가’에서 “독립적인 사법기관의 구성원을 마음대로 해임할 수 없는 경우, 독재자는 ‘대법원 재구성(court packing)’을 통해 우회할 수 있다”고 지적합니다. 책에 제시된 사례를 몇개 들면 헝가리 오르반 정권이 헌법재판관을 기존 8명에서 15명으로 늘려 친정부 판사들로 채운 게 대표적입니다. 베네수엘라 차베스 정권은 2004년 대법원 규모를 20명에서 32명으로 늘렸고, 이후 대법원은 9년 동안 정부에 반대하는 판결을 하나도 내놓지 않았습니다. 미국 루즈벨트 대통령은 뉴딜 정책을 방해하는 연방대법원을 손보기 위해 6명의 대법원 판사를 추가로 임명하는 ‘대법원 재구성 계획’을 밝혔지만 공화당은 물론 언론, 유명 법률가, 심지어 같은 민주당 인사들까지 반대에 나서면서 결국 실패로 끝났습니다.
민주당의 대법관 증원안이 정말 ‘상고심 충실화’를 위한 것인지, 아니면 코트 패킹을 위한 것인지를 가늠할 수 있는 기준은 그 시점과 방식입니다. 민주당이 대법관 30명 증원안을 처음으로 꺼내 든 시점은 올해 5월 2일, 대법원 전원합의체가 이재명 대통령의 공직선거법 위반 사건을 유죄 취지로 파기환송한 바로 다음날입니다. 여당은 대법원장 탄핵·국정조사·청문회 카드와 함께 대법관 정원을 100명까지 대폭 확대하는 방안을 잇달아 꺼냈습니다. 최근에는 증원 숫자를 돌연 26명으로 조정했는 데, 법안이 국회를 통과할 경우 이재명 대통령이 임기 중 대법관 22명을 임명하게 됩니다.
분과위는 “여당이 추진하는 대법관 수 증원안과 대법관 추천방식 개선안과 관련해 법관들 사이의 자유로운 토론과 의견 교환을 위한” 토론회를 25일 개최한다고 밝혔습니다.
판사 8명으로 이뤄진 분과위의 위원장인 조정민 부장판사는 더불어민주당 최기상 의원이 전법대 의장이던 2018년 운영위원으로 손발을 맞춘 인물입니다. 조 부장판사와 함께 국제인권법연구회에서 활동했던 현 전법대 의장 김예영 부장판사도 분과위 8명에 포함돼 있습니다. 토론자로 섭외한 세명 중 유현영 수원지방법원 여주지원 판사도 같은 연구회 소속입니다. 또다른 토론자는 앞서 대법관 30명 증원안을 공개 찬성한 대한변협 측 인사입니다. 변협은 올해 5월 전합 선고 직후 성명을 통해 “대법관 증원은 재판받을 권리를 실질적으로 보장하기 위한 가장 현실적이고 직접적인 방안”이라며 조속한 추진을 주장했습니다.
이는 대법관 증원이 변호사 단체의 이해관계와도 얽혀있기 때문이란 게 법조계 내 평가입니다. 대법관 증원으로 전체 상고심 사건수가 증가하면, 변호사업계의 전체 파이가 커지기 때문이란 분석이 있습니다. 변협의 이전 집행부들 역시 이와 같은 맥락에서 상고 사건을 거르는 상고허가제나 상고심사제 도입에 줄곧 반대해왔습니다. 그러나 이러한 변협의 입장은 일반 국민이나 다른 법률전문가들과 상당한 차이가 있습니다.
김명수 대법원장때인 2020년 대법원 사법행정자문회의 산하 상고제도개선특별위원회가 성인 남녀 1135명을 대상으로 실시한 조사에 따르면 소송 유경험자 926명 중 45.8%가 고법 상고부 도입을 가장 희망했고, 대법관 증원은 가장 낮은 22.1% 응답에 그쳤습니다. 특히 상고심 소송을 직접 경험해본 국민 46.6%는 고법 상고부를 가장 희망한 것으로 나타났습니다.
판사, 검사, 법학교수, 변호사 등 법률전문가를 대상으로 한 조사에서도 상고심사제 도입이 55.4%로 1순위로 꼽혔습니다. 대법관 증원이란 답은 28.5% 수준이었습니다. 반면 변호사들은 대법관 증원(55.4%)을 1위로 꼽으며 일반 국민이나 다른 법률전문가들과 온도차를 보였습니다.
전법대 분과위가 오늘 개최한다는 토론회가 결국 그들만의 토론회로 끝나는 건 아닌지 모르겠습니다.
장혜진 기자 janghj@segye.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