세바스티앵 르코르뉘 프랑스 총리가 두 차례에 걸친 하원의 불신임 투표에서 가까스로 살아남았다. 하원이 에마뉘엘 마크롱 대통령에게 불리한 여소야대 국면이란 점을 감안하면 다소 뜻밖이다. 마크롱과 르코르뉘가 야권에 사실상 ‘항복’ 선언을 한 결과라는 풀이가 나온다. 이로써 2026년도 프랑스 예산안 통과에는 ‘청신호’가 켜졌지만, 프랑스 정치의 주도권은 정부·여당에서 야권이 주도하는 의회로 완전히 넘어갔다.
16일(현지시간) BBC 방송에 따르면 이날 프랑스 하원은 내각을 이끄는 르코르뉘를 상대로 불신임 투표를 두 차례 연달아 실시했다. 먼저 극좌 성향의 ‘굴복하지 않는 프랑스’(LFI)가 불신임안을 제기했고, 곧바로 극우 정당인 국민연합(RN)이 뒤를 이었다.
16일(현지시간) 프랑스 하원 본회의장에 출석한 세바스티앵 르코르뉘 프랑스 총리가 자신에 대한 의원들의 불신임 투표를 앞두고 목이 타는지 음료수를 마시고 있다. AP연합뉴스 첫번째 불신임안은 찬성 271표로 하원 과반 의석(289석 이상)에 근접한 끝에 가까스로 부결됐다. RN이 주도한 두 번째 불신임안은 과반 의석에 한참 못 미치는 찬성 144표를 얻는 데 그쳐 일종의 해프닝으로 끝났다. 좌파와 극우 진영을 합친 야권이 원내 과반 다수를 점한 여소야대 국면인데도 이런 결과가 나온 것은 좌파 중에서도 상대적으로 온건한 사회당이 총리를 끌어내리는 데에는 등을 돌렸기 때문이다. BBC는 “불신임 위기에 직면한 정부에 사회당원들이 구명 밧줄을 던져(threw a lifeline) 겨우 살렸다”고 묘사했다.
르코르뉘는 2024년 7월 여당의 참패로 끝난 프랑스 총선 이후 세 번째 임명된 총리다. 그의 두 전임자 - 미셸 바르니에, 프랑수아 바이루 - 는 모두 야권이 반대하는 예산안 처리를 밀어붙이다가 여소야대 하원의 불신임 가결로 낙마했다. 2017년 5월 마크롱의 대통령 취임 당시부터 계산하면 르코르뉘는 7번째 총리에 해당한다. 8년이 좀 넘는 마크롱의 재임 기간 동안 총리가 거의 1년에 한 번씩 바뀌는 극도의 정치 불안정을 경험한 셈이다.
16일(현지시간) 프랑스 하원 본회의장에서 마린 르펜(가운데) 등 극우 성향 국민연합(RN) 소속 의원들이 불신임 투표를 앞둔 세바스티앙 르코르뉘 프랑스 총리가 연설하는 동안 그에게 야유를 보내고 있다. 로이터연합뉴스 이번에 르코르뉘는 사회당을 비롯한 야권에 두 가지 커다란 양보를 했다. 먼저 2023년 마크롱이 강행한 연금 개혁의 포기다. 정년을 62세에서 64세로 늘려 연금 수급 기간을 그만큼 줄임으로써 연금 적자를 해소한다는 것이 개혁의 핵심이다. 하지만 야권이 강하게 반발하자 르코르뉘는 결국 “다음 대통령 정부에서 결정할 일”이라며 뒤로 물러났다. 두 번째로 제5공화국 헌법의 특징에 해당하는 49조 3항의 포기다. 이는 비상 상황에서 정부가 의회 동의 절차를 건너뛰어 예산안, 법률안 등을 확정하고 시행할 수 있도록 한 것이 핵심이다. 의회에 대한 정부의 우위를 보장한 헌법적 장치로 평가되나, 이번에 르코르뉘는 “향후 어떠한 경우에도 49조 3항을 발동하지 않을 것”이라고 야당에 맹세를 했다.
2018년 10월 프랑스 제5공화국 초대 대통령 샤를 드골(1890∼1970)의 사저가 있는 도시 콜롱베레되제글리즈 시청을 방문한 에마뉘엘 마크롱 대통령(오른쪽)이 시청에 내걸린 드골의 초상화를 바라보고 있다. 게티이미지뱅크 연금 개혁은 프랑스 대선 출마 당시 마크롱의 핵심 공약이었던 만큼 그 포기는 마크롱 정부의 집권 의미가 사실상 사라졌음을 뜻한다. 또 헌법 49조 3항의 포기는 향후 프랑스 정치를 정부·여당이 아니고 원내 과반 다수 세력인 야당들이 주도하게 됐다는 의미로 풀이된다. BBC는 이를 “대통령 권한의 쇠퇴를 반영하는 거대한 권력 이동”이라고 평가했다. 이어 “1958년 이전 제4공화국의 특징이었던 정당 정치로의 복귀를 예고한 것”이라고 덧붙였다. 프랑스 제4공화국(1946∼1958)은 그 이전의 제3공화국(1870∼1940)과 더불어 의원내각제를 채택했다. 군소 정당들이 난립하는 의회가 강한 권한을 행사하는 가운데 정작 그 의회의 신임에 기초한 정부는 허약하고 불안하기 그지없었다. 3·4공화국을 더한 82년간 내각이 120번 넘게 교체될 만큼 정치가 불안했다. 이에 1958년 프랑스 정권을 장악한 샤를 드골 장군은 대통령 권한을 대폭 강화한 제5공화국을 출범시켰다.
김태훈 논설위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