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자민당 총재가 됐지만 총리는 못 할 수 있는 여자라고 불리는 불쌍한 다카이치입니다. 하지만 그냥 포기하지는 않을 겁니다. ”
일본 집권 자민당 다카이치 사나에 총재는 지난 14일 한 강연회에 나와 이같이 말했다. 지난 4일 총재로 선출된 지 엿새 만에 연립여당이던 공명당으로부터 결별 통보를 받은 데다 야권의 정권교체 논의가 급물살을 타며 사면초가에 몰린 자신의 처지를 대변하는 발언이었다.
다카이치 사나에 자민당 총재가 지난 4일 당 대표 선거 후 사무실에서 발언하고 있다. 일본 집권 자민당과 유신회가 20일 연립정권을 수립하기로 하면서 다카이치 총재는 일본 첫 총리 취임이 확실시된다. 도쿄=AP연합뉴스 다카이치가 기사회생한 것은 제2야당 일본유신회와 손을 잡으면서였다. 유신회는 오사카 등 간사이(關西) 지방에 뿌리를 둔 정당으로, 외교·안보, 에너지 등 정책에서 자민당과 큰 이견이 없는 우파 정당이다. 헌법을 개정해 자위대를 국방군으로 바꾸자고 주장하는 등 자민당보다 오른쪽에 있다는 평가도 받는다. 사실상 총리 지명권을 쥔 중의원(하원·465석)에서 자민당(196석)과 유신회(35석) 의석을 합치면 과반(233석)에 근접한다. 유신회와의 연립정권 구성은 다카이치의 총리 자리를 예약할 수 있는 확실한 카드였던 셈이다.
자민당은 이를 위해 유신회의 12개 정책 요구사항을 받아들였다. 특히 유신회가 ‘절대 조건’으로 내건 △오사카 부(副)수도 구상 △국회의원 정수 10% 축소 △기업·단체 정치 후원금 폐지 △소비세 감세 등을 파격적으로 수용했다.
기업·단체 정치 후원금 규제 강화는 앞서 공명당이 강하게 요구했으나 다카이치가 즉답을 내놓지 않아 결국 자민·공명당 연립이 깨지게 된 사안이다. 공명당 사이토 데쓰오 대표는 20일 이를 두고 “지금까지의 자민당의 사고방식과 근본적으로 다르기 때문에 (양측이) 합의했다는 말을 듣고 깜짝 놀랐다”고 했다. 다만 자민당과 유신회는 후원금 규제와 관련해 다카이치의 총재 임기가 끝나는 2027년 9월까지 시간을 두고 결론을 내겠다는 방침이다.
의원 정수 축소는 여러 의원들의 이해관계가 얽힌 민감한 과제다. 유신회 요시무라 히로후미 대표는 “의원 입법도 가능하지만, 여당으로서 법안을 제출할 것”이라며 “한 번 약속을 한 이상 제대로 해줬으면 좋겠다”고 말했다.
아울러 소비세 감세는 지난 7월 참의원(상원) 선거 당시에도 야권이 강하게 주장했지만 자민당이 ‘대체 재원 마련 방안이 부족하다’며 반대했던 사안인데, 이번에 합의한 만큼 협의체를 설치해 논의를 이어가기로 했다.
강경 우파 성향인 다카이치가 유신회의 도움으로 총리직에 오르면 일본 정치가 우경화할 것이라는 우려가 나온다. 26년간 이어진 자민·공명당 연립 당시 ‘평화의 정당’인 공명당이 일종의 제어장치 역할을 해왔는데, 이젠 사라졌기 때문이다.
유신회와 연정을 꾸리더라도 ‘여소야대’ 구도는 여전한 데다 이달 말 동남아시아국가연합(ASEAN), 도널드 트럼프 미국 대통령의 일본 방문, 경주 아시아태평양경제협력체(APEC·에이펙) 정상회의 등 주요 외교 일정을 앞두고 있어 야당이나 주변국을 자극할 만한 행보는 자제할 것이라는 관측도 나온다.
다카이치는 태평양전쟁 A급 전범들이 합사된 야스쿠니신사에서 17∼19일 열린 가을 제사 기간 공물 대금을 사비로 냈을 뿐 신사 참배는 하지 않았다. 교도통신은 각료 재임 중에도 야스쿠니를 참배하던 다카이치의 이번 참배 보류를 두고 “중국, 한국의 반발 등 외교 영향을 고려한 것으로 보인다”고 풀이했다.
새로 출범하는 연립정권은 과거 공명당이 국정운영에 공동책임을 졌던 것과 달리 유신회 의원들이 내각에 참여하지는 않는, 느슨한 형태의 ‘각외(閣外) 협력’에 머무를 것으로 보인다. 요시무라 대표는 다만 “단순한 각외협력이 아니다”며 “정말 어려운 개혁을 실행해 나간다면 역시 책임을 져야 한다고 생각한다”고 말했다.
사진=로이터연합뉴스 20일 닛케이225 평균주가는 전 거래일 대비 3.37% 오른 4만9185로 장을 마감했다. 대담한 공적 투자 등 적극적 재정 지원, 적자국채 발행 증가 용인 등 아베 신조 전 총리의 ‘아베노믹스’와 유사한 재정·금융정책을 공약한 다카이치의 총리 취임이 확실시되자 시장이 반응한 것으로 평가된다. 이 지수가 4만9000선을 돌파한 것은 처음이다. 그러나 유신회는 재정 건전화와 일본은행의 독립성을 중시하는 정당이어서 다카이치가 경제정책에서 일정 부분 양보를 강요받을 수도 있다고 일본 싱크탱크 노무라종합연구소는 내다봤다.
도쿄=유태영 특파원 anarchyn@segye.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