여당이 사법개혁 일환으로 4심제 도입을 추진중이다. 대법원 판결에도 오류가 있을 수 있으니 헌법소원까지 허용하자는 취지다. 그런데 금융권에서는 오히려 소송 제기 자체를 막는 제도가 논의되고 있다. '편면적 구속력' 제도 도입이 이런 모순의 출발점이다.
편면적 구속력은 소액 분쟁에서 금융감독원의 분쟁조정안을 민원인이 수락하면 금융사가 이를 무조건 수용해 별도의 소송을 진행할 수 없게 하는 제도다. 새 정부 들어 소비자 보호를 강조한 금융당국 수장이 도입을 시사했고 여당도 법안 발의에 나섰다.
취지는 나쁘지 않다. 소액 분쟁에서 금융사가 힘으로 버티는 관행을 막자는 것이다. 하지만 금융 관련 분쟁은 법률적·기술적으로 복잡하다. 금감원 분쟁조정위원회가 과연 합리적이고 객관적인 판단을 내릴 수 있느냐는 우려가 크다. 7년 넘게 이어진 삼성생명 즉시연금 소송이 그 단적인 사례다.
이 사건은 2017년 즉시연금 가입자들이 "사업비를 뗀다는 설명 없이 연금을 덜 지급했다"며 금감원에 민원을 제기하면서 시작됐다. 당시 분조위는 생명보험사들에 추가 지급을 권고했다. 하지만 생보사들은 이를 거부했고 2018년 금융소비자연맹 주도로 공동소송이 제기됐다. 결국 대법원은 지난 16일 "생보사가 연금을 추가 지급할 필요가 없다"며 분조위 판단을 뒤집었다.
만약 당시 편면적 구속력이 있었다면 어땠을까. 즉시연금 가입자는 16만명, 미지급액은 약 1조원 규모였다. 1인당 약 625만원으로 제도 적용 대상인 소액 범주(1000만~2000만원)에 해당한다. 분조위 판단대로라면 생보사들은 거액을 추가 지급해야 했고 주주 입장에선 납득하기 어려운 결과가 됐을 것이다.
편면적 구속력은 되레 소비자 보호를 약화시킬 수도 있다. 즉시연금 사건은 소송을 거치며 일부 생보사가 설명 의무를 다하지 않았다는 사실도 확인됐다. 이에 금감원은 최근 후속조치에 나섰다. 소송 과정이 없었다면 이런 문제점이 드러나지 않았을 것이다. 자동차 사고처럼 과실비율을 두고 소비자 간 이해가 엇갈리는 분쟁에서는 분조위의 일회적 결정이 특정 소비자의 피해로 이어질 가능성도 있다.
분조위 구성도 소비자 중심이라 보기 어렵다. 전체 위원 35명 중 소비자 측 위원은 6명(17%)뿐이다. 나머지는 금융협회 출신이나 법조·의료계 등 금융사에 우호적인 전문가가 대부분이다. 구조적으로 금융권 시각이 더 반영될 수밖에 없는 셈이다.
한 금융사 임원은 "민원을 줄여야 하는 당국 입장에선 '그냥 돈 주고 끝내자'는 식의 제안이 나오기 쉽다"고 꼬집었다. 소비자 보호를 명분으로 한 제도가 결국 '행정 편의'로 변질될 수 있다는 지적이다. 당국은 편면적 구속력을 섣불리 도입하기보다 부작용을 최소화할 장치를 먼저 고민해야 한다. 돈으로 불만을 잠재우는 건 쉽지만 그것이 진정한 소비자 보호는 아니다.
최동현 기자 nell@asiae.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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