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기자수첩]지금 북극에서 사라지는 것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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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기자수첩]지금 북극에서 사라지는 것들

북극서클 총회가 열리는 아이슬란드 수도 레이캬비크 하르파 홀에서 해안도로를 따라 약 20분 걷다 보면 바다를 마주 보고 선 오래된 저택이 보인다. 1986년 10월 로널드 레이건 전 미국 대통령과 미하일 고르바초프 소련 공산당 서기장이 회담을 가졌던 역사적 장소다. 이 회담을 계기로 군축 협의가 급물살을 탔고, 마침내 1989년 냉전 종식 선언에 이를 수 있었다. 21세기 인류가 당연하게 누려온 평화가 이곳 섬나라 해안가의 작은 집에서 시작된 셈이다.


'평화와 개방, 협력'의 상징과도 같은 이 도시에서 북극의 미래를 논하는 총회가 올해로 12번째 열렸다. 북극서클 총회는 여타 국제행사들과 달리 특정한 슬로건을 지정하지 않는다. '열린 논의'로 대표되던 이 총회는 2021년 러시아·우크라이나 전쟁이 터지면서 분위기가 급변했다. 북극해 연안의 최대 지분을 차지한 러시아는 전쟁을 일으킨 뒤 총회에서 자취를 감췄다. 최근엔 미국과 중국까지 대놓고 북극항로에 눈독을 들이면서 지정학적 리스크는 더욱 커졌다.


러시아는 이제 북극권 국가들에 '공공의 적'이다. 돈으로 그린란드를 사겠다는 미국(정확히는 도널드 트럼프 대통령)도 미움을 샀다. 마이크를 쥔 패널들은 미·러를 향해 강도 높은 비판을 쏟아냈다. 한 학자는 8개의 북극권 국가가 마치 멜론을 조각내듯 북극 지역을 분할할 것이란 '멜론 시나리오'를 제기했다.


그런데 회의실 밖 '복도 민심'은 다소 온도 차가 느껴졌다. 한 영국 과학자는 "북극 지역의 실측 데이터를 가장 많이 보유한 러시아가 빠지면서 협력 연구들이 멈춰섰다"고 안타까워했다. 장기적 관찰이 핵심인 기후 연구에서 수년째 '데이터 공백'을 지켜봐야 하는 과학자들은 그야말로 애가 탈 것이다. BTS의 팬이라며 기자에게 다가온 스웨덴 북극 원주민 출신의 한 소녀도 러시아의 불참이 "슬프다"며 "누구보다 북극에 대한 지식, 경험이 풍부한 러시아 원주민들이 여기 와서 목소리를 내야 한다"고 말했다.


뜻밖의 대답에 정신이 번쩍 들었다. 지금 북극에서 녹고 있는 것은 비단 빙하만이 아니었다. 인류가 수차례의 크고 작은 전쟁을 거치며 어렵게 쌓아온 '대화와 협력' 정신도 속절없이 녹고 있었다. '지구의 냉장고'라 불리며 범지구적 생태계를 지탱해 온 북극이 전쟁터가 된다면, 얼마나 끔찍한 광경을 봐야 할까. 세계 질서가 녹은 자리에 드러날 야만은 벌써부터 두렵다. 탈냉전의 첫 페이지를 열었던 이곳의 현실은 이미 비극이 아닐 수 없다. 북극은 절대적으로 평화의 바다가 돼야 한다. '스트롱 맨'들에 의해 무너지는 다자주의를 다시 생각해야 할 때다.






손선희 기자 sheeson@asiae.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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