김정은 북한 국무위원장이 3일 중국 전승절 80주년 행사에서 시진핑 중국 국가주석, 블라디미르 푸틴 러시아 대통령과 어깨를 나란히 하는 모습을 연출하면서 이번 방중의 전략적 목표를 달성했다는 평가가 나온다. 강대국과 다자외교 무대를 주도하는 정상국가 이미지를 부각하고, 신냉전 구도 속 높아진 전략적 지위를 과시하는 효과를 거뒀다는 뜻이다.
김 위원장은 이날 행사 내내 외국 정상들 가운데 푸틴 대통령에 이은 의전서열 2위의 극진한 예우를 받았다. 김 위원장은 열병식 전 기념사진 촬영에서 시 주석 부부 좌측 첫 번째 자리에 섰고, 톈안먼 망루 위에서도 시 주석 바로 왼쪽에 앉았다. 김일성 주석은 1959년 신중국 건국 10주년 기념 열병식 때 마오쩌둥 주석과 떨어진 자리에 섰는데, 김 위원장은 중국 최고 권력자와 가장 가까운 외국 정상으로 자리매김한 것이다.
북·러 양자회담 중국 전승절 80주년 기념 열병식 참석차 베이징을 방문한 김정은 북한 국무위원장(왼쪽)과 블라디미르 푸틴 러시아 대통령이 3일 댜오위타이 국빈관에서 양자회담을 진행하고 있다. 베이징=타스연합뉴스 이는 미·중 무역 전쟁, 우크라이나 전쟁 등 신냉전 구도 속에서 북한의 높아진 몸값을 보여주는 상징적인 장면이라는 평가가 나온다. 미·중 전략 경쟁이 격화하고 한·미·일 협력이 심화하면서 그 반대급부로 중·러가 북한을 끌어당기는 힘 또한 강해지고 있다는 것이다. 일각에선 내달 북한 노동당 창건 80주년 열병식에 시 주석이 방북할 가능성을 배제할 수 없다는 관측도 나온다. 김 위원장은 이날 베이징에서 푸틴 대통령과 양자회담을 갖고 양국 관계를 다지기도 했다. 러시아 타스통신에 따르면 김 위원장과 푸틴 대통령은 이날 연회에 참석한 뒤 같은 차량을 타고 회담장으로 향했다. 푸틴 대통령은 이 자리에서 우크라이나 전쟁에 참전한 북한군에 감사를 표하며 용감하게 싸워준 북한군을 절대 잊지 않을 것이라고 말했다. 김 위원장은 북한이 러시아를 도울 수 있다면 반드시 도울 것이라면서 양국이 다양한 분야에서 협력을 강화하기 위해 노력해야 한다고 언급했다. 김 위원장은 이날 알렉산드르 루카셴코 벨라루스 대통령에게 방북을 요청하며 외교 지평을 넓히는 행보도 보였다. 벨라루스는 대표적인 친러시아 국가다.
북한이 중·러 주도의 외교 무대에 본격 편입하는 흐름은 김 위원장이 목표로 삼아온 핵 보유 정당화를 달성하는 기반이 될 것으로 보인다. 북한이 중·러와의 관계를 통해 제재를 우회하고 경제·군사 협력을 이어갈 수 있는 데다 대미 협상력 또한 제고할 수 있어서다. 김 위원장의 이번 방중은 미국과의 핵 협상 재개 발판 성격이라는 해석이 나온 것도 그래서다. 북한이 대외 전략을 전환하는 사전 작업으로 전통적인 우방국들과의 관계를 다지며 후방을 강화하려는 의도가 깔렸다는 것이다.
66년 전 김일성은 마오쩌둥 옆 세번째 북한·중국·러시아 지도자가 66년 만에 중국 베이징 톈안먼 망루에 올랐다. 사진은 1959년 김일성 북한 국가주석(왼쪽부터), 저우언라이 중국 국무원 총리, 호찌민 초대 베트남 국가주석, 마오쩌둥 중국 국가주석, 니키타 흐루쇼프 소련공산당 서기장이 망루에 서서 중국 건국 10주년 열병식을 보는 모습. X캡처 북한은 전통적으로 한·미 등과 관계 개선을 꾀하기 전 최고지도자가 중국을 찾는 행보를 보여왔다. 김 위원장은 도널드 트럼프 미국 대통령과 두 차례 정상회담을 가진 2018∼2019년 네 차례 방중해 시 주석과 회담했다. 김정일 국방위원장은 남북 정상회담을 갖기 전 2000년 5월 중국을 찾은 바 있다. 다만 트럼프 행정부의 ‘북한 비핵화’ 목표와 북한의 핵보유국 지위 입장에 간극이 큰 상황이라 이번 방중이 북·미 대화를 겨냥했다고 단정하기는 어렵다는 평가도 있다. 그보다는 중국과 관계를 복원해 경제 협력을 꾀하고 향후 북·러 관계가 재조정될 가능성에 대비해 외교를 다변화하는 데 일차 목표가 있다는 것이다. 두진호 한국국가전략연구원 유라시아센터장은 “전승절 80주년 행사에 김 위원장을 시진핑 주석의 왼쪽에 세웠다는 것은 중국이 사실상 북한을 핵보유국으로 인정하겠다는 것”이라면서 “북한은 중·러 모두를 ‘전략적 뒷배’로 삼게 돼 미국과의 협상을 서두르지 않을 가능성이 높으며 안전보장에 더해 경제적 보상책이 북·미 대화의 조건이 될 것으로 보인다 ”고 전망했다.
한편, 김 위원장 방중 수행단에는 여동생 김여정 당 선전선동부 부부장, 조용원·김덕훈 당 중앙위원회 비서, 주창일 당 선전선동부 부장, 김성남 당 국제부 부장, 최선희 외무상, 현송월 당 선전선동부 부부장 등이 포함된 것으로 보인다. 국방성이나 인민군 고위 인사의 모습은 확인되지 않고 있는데, 이들이 핵무기·탄도미사일 개발에 관여해 안전보장이사회의 제재 대상에 올라 있기 때문일 가능성이 거론된다.
김병관 기자 gwan2@segye.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