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975년 4월 월남 패망 당시 주월남 한국 대사관 공사를 지낸 이대용(1925∼2017) 장군. 오른쪽 사진은 육군 장교로서 6·25 전쟁에서 혁혁한 무공을 세우던 시절의 모습. 세계일보 자료사진 1960년대 한국은 공산주의에 물든 북베트남(월맹)의 공세로부터 자유 진영의 일원인 남베트남(월남)을 지키고자 월남 파병을 단행했다. 당시 월남은 한국의 맹방일 뿐더러 다수의 한국군 장병이 주둔하고 있으니 현지 대사관 역할이 무척 중요했다. 이대용 대령이 3년간 주(駐)월남 대사관 무관으로 복무한 배경이었다. 그가 1968년 처음 별을 달고 준장으로 진급한 뒤에도 월남과의 인연은 계속됐다. 무관에 이어 이번에는 현역 장성 신분으로 정무공사를 맡아 대사관에서 계속 일하게 된 것이다. 전쟁 중인 국가에서 근무해야 하는 만큼 평범한 외교관 중에서는 적합한 인재를 찾기가 어려웠던 모양이다. 월남 패망 2년 전인 1973년 이 장군은 주월남 대사관 부대사로 내정됐다. 하지만 부대사 직제가 사라지며 대신 경제공사를 맡았다. 그때까지도 전역 조치가 이뤄지지 않아 여전히 현역 준장이었다. 1975년 4월 30일 월남 수도 사이공이 월맹군 수중에 떨어진 순간 이대용 장군은 다른 외교관 2명과 함께 마지막까지 대사관을 지켰다. 우리 교민들이 모두 안전하게 철수할 수 있도록 하기 위해서였다. 이후 월맹 당국에 의해 불법으로 억류된 이 장군은 온갖 고초를 겪었다. 공산 베트남의 우방인 북한은 황해도 금천이 고향인 그의 북송 실현에 총력을 기울였다. 남한을 중상모략하고 북한 체제를 선전하는 데 이용하려는 속셈이 뻔했다. 북측의 공작이 어찌나 집요했던지 이 장군은 “북한으로 강제 납치되어 끌려갈 때에는 자결하겠다”며 어린 자녀들의 대학 졸업시까지 드는 학비 지급을 대한민국 정부에 부탁하는 유서를 남겼다. 온 국민의 염원 속에 이 장군 일행 석방을 놓고 치열한 외교 협상이 벌어졌다. 결국 그는 베트남 억류 5년 만인 1980년 4월 풀려나 고국 땅을 밟았다.
6일 서울 용산 전쟁기념관에서 ‘이달(11월)의 호국 영웅’ 이대용 장군(영정 사진)을 기리는 현양 행사가 열려 고인의 정점식 국민의힘 국회의원(왼쪽부터), 백승주 전쟁기념사업회장, 기덕영 황해도지사, 육군 6사단 이경필 부사단장 등이 기념촬영을 하고 있다. 전쟁기념사업회 제공 6일 전쟁기념관 중앙홀에서 ‘이달(11월)의 호국 인물’로 선정된 이대용 장군을 기리기 위한 현양 행사가 열렸다. 기념관 운영 주체인 전쟁기념사업회 백승주 회장은 이 장군을 향해 “6·25 전쟁은 물론 베트남 전쟁에서도 조국을 위해 헌신하신 분”이라고 찬사를 바쳤다. 이어 “이번 행사를 통해 많은 분들이 호국 영웅의 희생과 국가의 소중함을 다시금 느끼는 계기가 되길 바란다”고 당부했다. 오늘날 국립대전현충원에 안장된 고인의 묘비에는 이렇게 새겨져 있다. ‘한 평생 대한민국 국민임을 자랑으로 여기며 감사했고, 충심으로 국가에 헌신하며 (…) 언제나 곧고 바른 길을 걸었던 정의로운 군인.’ 참으로 가슴이 숙연해지는 대목이 아닐 수 없다. 삼가 고인의 명복을 빈다. 김태훈 논설위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