하나은행 김정은이 세계비즈앤스포츠월드 창간 20주년을 축하하고 있다. 사진=하나은행 농구단 제공 “아직도 생생해요. 그땐 정말 아무것도 모르고 뛰었죠.”
충남에서 나고 자란 농구소녀는 신세계 쿨캣(하나은행의 전신)의 지명을 받고 서울 종로구 청운동 숙소에 가방을 풀었다. 낯설기만 했던 풍경 속 ‘일단 부딪혀보자’며 코트에 나선 2005년 겨울, 열여덟 김정은의 첫걸음이었다.
그해 12월21일, 용인 원정서 데뷔전을 치렀다. 스스로 기록을 줄줄 외울 만큼 기억이 또렷하다. 삼성생명전(82-80 승), 44분47초를 뛰며 16점을 올렸다. 김정은은 “긴장은 했지만 ‘신인인데 괜찮겠지’ 하는 마음이 더 컸다. 피하지 않고 부딪힌 게 통했던 것 같다”고 웃었다.
어느덧 20년이 흘렀다. 불혹이 가까워지는 나이에도 코트 위를 종횡무진한다. 그 사이 우리은행을 거쳐 친정 하나은행으로 돌아온 김정은은 여자프로농구(WKBL) 통산 최다 득점(8333점)을 새로 쓴 ‘리빙 레전드’가 됐다. 창간 20주년을 맞은 세계비즈앤스포츠월드가 현역 마지막 시즌을 준비 중인 그를 만났다.
사진=하나은행 농구단 제공 ◆ 마지막을 준비하며
김정은은 지난 2월 WKBL 시상식에서 “선수 생활을 1년 더 하기로 결심했다”고 깜짝 발표해 화제를 모았다. 당시를 돌아본 그는 “사실 충동적이었다”면서도 “지금 돌아보면 다 이유가 있었던 것 같다. 갈팡질팡하던 마음을 잡아준 사람들이 많았다”고 웃었다.
앞서 시즌 종료 후 회식 자리에서 후배들이 ‘더 함께해달라’며 붙잡았던 일화가 대표적이다. “그 시점이 ‘이대로 끝내는 게 맞나’ 고민하던 때라 마음이 크게 흔들렸다”는 후문이다.
“진짜 마지막”이라 못 박았다. “살면서 한 번도 ‘디데이(D-DAY)’를 달력에 표시한 적이 없는데 이번엔 다르다”고 운을 뗀 김정은은 “휴대폰엔 이번 시즌 정규리그 마지막 경기 날짜인 4월1일이 표시돼 있다. ‘빨리 끝났으면’이 아니다. 다시 오지 않을 순간이니까 하루하루를 소중히 보내자는 의미로 매일 들여다본다”고 설명했다.
절친 이경은 신한은행 코치의 말도 큰 울림을 줬다. 김정은은 “‘후회가 전혀 없어’라는 그 말이 와닿았다. 후회 없는 마지막을 보내는 게 길었던 농구 인생에 대한 예의라고 생각한다”고 말했다.
마지막을 향해 달려간다. 김정은은 “개인 기록엔 미련이 없다. 플레이오프(PO)에 가는 게 첫 번째 목표다. 30경기, 아니 한 경기라도 더 뛰고 싶다”고 힘줘 말했다.
사진=하나은행 농구단 제공 ◆ 반복에 지치지 말라
김정은이 요즘 후배들에게 부쩍 자주 전하는 메시지가 있다. 바로 “반복에 지치지 말라”는 말이다. 스스로의 농구 인생을 돌아보며 “벌써 두세 번은 은퇴했어야 하는 몸이었다. 그런데 재활이든 웨이트든 결국 가장 강한 힘은 반복에서 나오더라”고 했다.
“비시즌이 항상 참기 힘들다. 6, 7개월을 매일 같은 루틴으로 버텨야 한다. 그래서 후배들에게도 ‘절대 반복에 지치지 말라’고 강조한다”는 그는 “과정이 참 고되지만, 결국 그걸 이겨낸 선수가 꽃을 피워낼 시기를 맞는다. 그런 선수들을 실제로도 많이 봤다”고 말했다.
‘셔틀콕 여제’ 안세영과의 대화에서 확신을 얻기도 했다. 김정은은 “예전 인터뷰에서 비슷한 내용을 말했는데, 배드민턴의 안세영 선수가 보고 감명을 받았다고 밝힌 적이 있다. 너무 반가워서 사회관계망서비스(SNS) 다이렉트메시지(DM)를 통해 이야기를 나눴다”며 “자기도 힘든 시기에 ‘반복에 지치지 않겠다’는 다짐을 했다고 하더라. 진짜 인생의 진리 같다”고 전했다.
김정은은 “다 때가 있고 다 시기가 있다. 그 순간을 참고 이겨내야 자기 시간, 자기 무대가 온다”며 “기왕 운동을 시작했다면 농구로든, 스포츠로든 누릴 수 있는 걸 다 누렸으면 좋겠다. 돈이든 명예든, 그만큼 고된 길이지만 세상에 쉬운 건 없다”고 말했다.
사진=하나은행 김정은 사회관계망서비스(SNS) 캡처 ◆ 남기고 싶은 ‘하나’
얼마 전 집을 정리하다 남편의 ‘보물’을 발견했다. 김정은은 2016년 럭비선수 출신인 정대익 씨와 결혼했다. 은퇴 후 운동복을 모두 정리한 줄 알았는데, 남편의 낡은 헤드기어 하나가 작은 파우치에 곱게 싸여 있었다.
김정은은 “남편이 ‘운동복은 다 버렸다’고 했었는데, 헤드기어만 슬쩍 숨겨놨더라. ‘못 버린 데는 이유가 있겠구나’ 싶었다”고 말했다. 이어 “그 안에 선수 시절의 땀과 열정, 그 시절의 감정이 다 들어가 있을 듯했다. 그래서 ‘나는 하나를 남긴다면 뭘 남기지?’라는 생각을 하게 됐다”고 덧붙였다.
현시점 남기고픈 ‘하나’는 유니폼이다. “11년 전 인천 아시안게임 금메달도 떠올랐지만, 결국 마음이 향한 건 우리은행 이적 첫해에 입었던 유니폼이었다. 같이 뛰었던 선수들의 사인이 다 적혀 있다”고 말했다. 커리어 첫 우승과 챔피언결정전 최우수선수(MVP) 등극을 누렸던 순간이다.
이유는 분명했다. 김정은은 “선수로서 가장 바닥이라고 느꼈을 때 옮긴 팀이 우리은행이었다”며 “감독·코치님들이 정말 많은 공을 들여주셨고, 나 역시 다시 하라면 못할 정도로 힘든 훈련을 버텼다. 그 과정을 통해 얻은 우승이고, 명예 회복이었다. 그래서 정말 특별하다”고 말했다.
사진=하나은행 농구단 제공 ◆ ‘다음 20년’도 농구장에서
20년 후 김정은은 또 어떤 모습일까. 곧장 미소를 지으며 “그때도 농구장에 있지 않을까요?”라고 말했다. 그는 “나이가 들수록 지도자에 대한 꿈이 더 뚜렷해진다. 제대로 지도자를 한번 해보고 싶다”며 “그때쯤이면 지도자로서 이룰 건 다 이루고, 중·고교 아이들을 가르치며 재능기부를 하고 있을 것”이라고 내다봤다.
더불어 진지한 표정으로 “농구를 정말 좋아한다. 지금이나 20년 후나, 농구를 통해 좋은 영향을 주고 싶다는 마음은 변하지 않을 것 같다”고 덧붙였다.
2005년 첫 장을 연 세계비즈앤스포츠월드는 올해로 창간 20주년을 맞았다. 김정은 역시 그 시간을 오롯이 함께 걸어왔다. 그는 끝으로 “각자의 자리를 묵묵히 채웠다는 건 감사한 일이다. 다음 20년 뒤에도 꼭 다시 만나 예전 얘기를 다시 나누면서 웃을 수 있으면 좋겠다”고 목소리를 높였다.
사진=하나은행 농구단 제공