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오늘 뭘 드실까요?" "음… 서운함 하나 주세요."
2025년 5월, 일본 주류회사 산토리는 도쿄 시부야에 특별한 팝업 바 '글래스 앤 워즈(Glass and Words)'를 열었다. 이곳에서는 칵테일 이름이 아닌 '기분'을 주문한다. 선반에는 빈 잔이 줄지어 있고, 코스터에는 설렘·그리움·짜증 등 감정을 표현한 문구가 적혀 있다. 손님이 지금의 기분을 선택하면 바텐더가 그에 맞는 칵테일을 만들어준다. 2024년 첫 행사부터 전석 매진을 기록하며 화제가 되자, 2025년에는 예약 부스를 늘리고 메뉴도 한층 다양해졌다.
최근 '기분 큐레이션' 시장이 빠르게 성장하고 있다. 기분 큐레이션이란, 사용자의 현재 감정 상태에 맞춰 상품이나 서비스를 '처방'하듯 추천하는 방식이다. 과거의 큐레이션이 취향, 소비 이력, 선호도 등 객관적 데이터를 기반으로 했다면, 기분 큐레이션은 그보다 더 주관적이고 순간적인 '감정'을 중심에 둔다.
기분에 따라 책을 추천하는 이색 서점도 등장했다. 2025년 3월, 이탈리아 작가 로렌초 마로네와 폭력방지센터 출신 로베르타 니코데모가 나폴리에 문을 연 '루체(Luce)'가 그 주인공이다. 이곳은 추리소설이나 로맨스 같은 장르 대신 '기쁨·분노·슬픔·불안' 네 가지 감정으로 책을 분류한다. 마음이 우울한 이에게는 '슬픔' 섹션의 책을, 화가 난 이에게는 '분노' 섹션의 책을 권한다. 단순한 서점이 아니라, 독서 치료와 상담을 통해 감정을 돌보는 힐링 공간이다.
이제 영화도 '기분'으로 검색하는 시대다. 2025년 4월, 넷플릭스는 오픈AI 기반의 기분 맞춤형 검색 기능을 시험 중이다. 장르나 배우 대신 '우울할 때 볼 영화', '기분 전환용 코미디' 같은 감정 키워드로 콘텐츠를 찾을 수 있는 방식이다. 현재 호주와 뉴질랜드 일부 지역에서 테스트가 진행 중이며, 곧 글로벌로 확대될 예정이다. 이 기능은 시청자의 선택 기준을 '무엇을 볼까'에서 '지금 내 기분에 맞는 영화는?'으로 바꾸며, 콘텐츠 소비 방식을 근본적으로 재편하고 있다.
배달음식 선택에도 이제 '기분'이 중요한 기준이 되고 있다. 배달의민족 조사에 따르면 이용자 3명 중 1명은 메뉴를 정하지 않은 채 앱을 연다. 이른바 '넷플릭스 증후군'처럼, 무엇을 먹을지 결정하지 못한 채 시간을 보내는 것이다. 이를 포착한 배달의민족은 2024년 3월 챗GPT 기반 기분 맞춤형 메뉴 추천 서비스를 선보였다. 축적된 리뷰 데이터를 분석해 사용자의 감정과 상황에 맞는 음식을 제안하는데, 예컨대 "퇴근길 스트레스로 매운 떡볶이를 시켰다"는 리뷰를 학습해, 비슷한 감정 상태의 사용자에게 해당 메뉴를 추천하는 식이다.
'기분 큐레이션'은 첨단기술과 결합하며 빠르게 진화하고 있다. 대표적인 예가 음성 인식 기술이다. 연구에 따르면 대화의 90% 이상은 목소리 톤, 표정, 몸짓 같은 비언어적 신호로 전달된다. AI 스피커나 스마트폰은 목소리의 높낮이·속도·떨림을 분석해 사용자의 감정을 실시간으로 파악할 수 있다. 안면인식 기술 역시 미세한 근육 움직임, 즉 '미세표정'을 감지해 잠깐의 감정 변화까지 읽어낸다. 여기에 웨어러블 바이오센서가 결합하면 심박수·피부 전도도·수면 패턴 등 생체신호를 기반으로 스트레스나 긴장 수준까지 측정할 수 있다. 결국 기술은 '신체 데이터'를 넘어 '감정 데이터'를 해석하는 단계로 진화하고 있다.
목소리 이외에도 심박수나 뇌파 같은 생체정보가 기분을 파악하는 중요한 단서로 부상하고 있다. 스마트 시계, 스마트 링 등 웨어러블 디바이스가 생성하는 정보가 그동안 주로 건강을 추적하는 목표로 이용되었다면, 앞으로는 기분을 읽는 정보로 활용될 수 있다. 가령 "심박수가 얼마지?"에 대한 정보가 이제는 "지금 화가 났구나"의 정보로 확장된다. 뇌파 헤어벤드 '뮤즈(Muse)2' 디바이스가 대표적인 사례다. 몸에 가장 밀착되는 기술인 만큼, 뇌파 · 호흡 · 심박수를 활용해 사용자의 마음 상태를 실시간으로 피드백한다. 기분에 따라 명상이나 휴식을 제안하기도 한다.
이러한 트렌드가 나타나는 배경에는 현대인에게 '감정'이 관리의 대상이기 때문이다. 현대인은 이전보다 훨씬 더 많은 자극과 정보 속에 살고 있다. 그러나 정작 자신의 '기분'을 세밀하게 인식하고 표현하는 능력은 오히려 퇴화했다. 바쁘다는 이유로 감정을 미뤄두고, 괜찮다는 말로 마음을 덮어두는 사회 속에서, 사람들은 자신이 지금 어떤 상태인지조차 모른 채 피로와 공허를 반복한다. 이때 '기분 큐레이션'은 자기감정에 다시 접속하게 해주는 감성적 매개로 작용한다. 더 상품은 기능으로만 평가되지 않는다. "지금 내 마음을 이해해주는가?"가 구매의 결정 요인이 되고 있다. 감정을 이해하고, 위로하고, 돌보는 상품과 서비스에 소비자가 몰리는 이유다.
기업 입장에서 기분 큐레이션의 확산은 '데이터 중심'에서 '감정 중심'으로의 패러다임 전환을 의미한다. 앞으로의 시장은 누가 더 많은 데이터를 보유하느냐보다, 그 데이터를 통해 인간의 '기분'을 얼마나 정교하게 해석하느냐가 승부를 가를 것이다. AI 추천 시스템이 단순히 "이전에 본 것"을 권하는 단계를 넘어, "지금 당신의 마음에 필요한 것"을 제안하는 방향으로 진화할 것이다. 따라서 기업은 소비자의 일상 데이터를 기술적으로 수집하는 것을 넘어, 감정의 맥락을 읽어내는 감성 알고리즘을 구축해야 한다. 또 브랜드의 언어, 공간, 심지어 제품 패키징까지도 감정적 공명을 일으키는 방식으로 설계해야 한다. 미래의 경쟁력은 기술이 아니라, 기술을 통해 인간의 마음을 얼마나 섬세하게 읽어내느냐에 달려 있다.
최지혜 서울대학교 소비트렌드분석센터 연구위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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