정대영 제천여중 코치가 아이들을 지도하고 있다. 사진=본인 제공 2024년 2월18일 GS칼텍스와 IBK기업은행의 맞대결, 현역 최고령 정대영(당시 43살)이 상대 리베로 김채원의 디그가 곧장 넘어오는 걸 놓치지 않고 ‘다이렉트 킬’로 연결해 한 점을 올렸다. V리그 통산 523번째 출전-5653번째 득점, 정대영이 여자배구에 남긴 마지막 발자취였다. 2023~2024시즌을 마치고 25년간 달아온 ‘선수’ 이름표를 뗐다. 오지 않을 것 같았던 작별, 그렇다고 해서 정대영의 도전이 멈춘 건 아니다. 유리천장과의 사투로 점철된 그의 배구인생은 특유의 묵직함과 꾸준함으로 현재진행형의 시제를 가리키고 있다.
◆낭중지추
1981년생 정대영과 배구가 처음 눈을 마주한 건 초등학교 6학년이던 1993년이다. 168㎝의 소녀에게 아버지의 친구였던 체육 선생님이 배구를 추천했다. “멋모르고 했던 배구가 너무 재밌었다”는 그의 회상은 그 만남이 운명이었음을 증명한다. 물론 “그렇게 힘들 줄 알았으면 사실 안했을 것”이라는 진솔한 고백도 뒤를 잇는다. 어머니를 향해 “진짜 운동 안하고 싶다”고 외쳐봤지만 “너가 선택한 거니까 고등학교 졸업할 때까지는 해봐”라는 냉철한 한마디에 투정을 집어넣었다.
주머니 속 송곳과 같았던 재능은 금세 빛을 발했다. 양백여상 1학년이던 1997년 전국체전에서 에이스로 준우승을 견인하며 전국구 스타로 이름을 떨쳤다. “상대도 안 될 거라 했던 팀들과 접전을 펼치고 심지어 승리도 거뒀다. 그때의 내 모습을 보며 ‘그래도 배구를 좀 하는구나’는 생각이 들었다”는 그는 자연스레 태극마크까지 짊어지는 여자배구 간판으로 성장했다. ‘선수’ 정대영의 시계는 그렇게 1999년 실업팀 현대건설에서 힘차게 돌아가기 시작했다.
현대건설 시절의 정대영(오른쪽). 사진=KOVO 제공 ◆편견의 벽
강산이 두 번이나 바뀐 긴 여정을 관통하는 단어는 바로 ‘도전’이었다. 그가 꼽은 현역 시절 키워드들은 여성 선수로서 끊임없이 머리를 찧어야 했던 유리천장과의 사투로 엮여 있다.
쌓여가는 나이, 결혼과 출산이라는 인생의 단계들은 선수 생활과 불가피한 충돌을 만들었다. 그는 “지금은 말도 안되지만, 내가 어렸을 때는 23, 24살 정도만 돼도 노장으로 불렸다. 여자 선수들은 그 시기에 은퇴해서 아예 배구를 놓고 결혼해서 아이 낳거나, 학교에서 기간제 선생님을 하거나 하는 분위기였다”고 돌아봤다.
정대영도 당연히 고민의 시기를 겪었다. 2005년 V리그 출범과 함께 프로 선수로 거듭났지만, 리그 최초 자유계약선수(FA) 자격을 얻은 2007년에 첫 갈림길을 마주했다. 그는 “프로화와 함께 조금 더 배구를 했지만, 그해에 스무살 때부터 만났던 남편과 결혼을 하게 됐다. 평범한 아내이자 엄마로서의 삶에 대한 고민이 분명 있었다”고 돌아봤다.
GS칼텍스의 강력한 구애가 도전의 기폭제가 됐다. 노장 수식어에도 자신의 능력을 믿어주는 팀을 위해 이적을 결심했고, 손에서 공을 놓지 않았다. 그는 “내가 딱 2년만 더하고 출산을 위해 은퇴하겠다는 조건까지 내걸었는데도 다 수용해주셨다. 심지어 아이 낳더라도 출산휴가를 줄테니 언제든 돌아오라고까지 말해줬다”며 “기대에 부응하고 싶다는 생각이 들었다. 이참에 여자 선수들을 향한 편견을 깨봐야겠다고 느낀 순간”이라고 힘줘 말했다.
힘차게 날아올랐다. 이적 첫 해였던 2007~2008시즌, 정규리그 3위에 이어 챔피언결정전에서 3연패를 노리던 김연경의 흥국생명을 잡는 기염을 토했다. 정대영은 포지션에 구애받지 않는 뛰어난 리시브 능력과 백어택 등을 앞세운 원맨쇼로 팀과 자신의 프로 첫 우승을 견인했다. 챔프전 최우수선수(MVP)도 당연히 그의 몫이었다. 첫 유리천장을 시원하게 깨부순 순간, 정대영은 “실업팀에서 우승을 안 해본 건 아니었지만, 그때 경험한 프로 첫 우승의 짜릿함은 아직도 잊히지 않는다. 무엇보다 안 될 거라는 주변의 부정적인 시선을 이겨냈다는 점이 가장 자랑스러웠다”고 돌아봤다.
◆‘엄마 선수 1호’
정대영(왼쪽)과 임명옥이 경기 전 대화를 나누고 있다. 사진=KOVO 제공 또다른 천장이 존재했다. 2010년 딸 김보민 양을 낳으면서 받아든 엄마라는 무거운 이름표였다. 최고의 선수였던 정대영이었지만 출산으로 인한 체력 및 신체능력 저하 등 자연의 섭리마저 거스를 수는 없었다.
그는 “아무래도 몸이 임신, 출산 이전과 같을 수는 없었다. 운동량이 줄다보니 당연히 체중도 늘었고, 체력도 떨어지는 느낌”이었다고 고백했다. 포기할 수는 없었다. GS칼텍스는 선약대로 그에게 출산 및 육아 휴가를 보장했다. 그는 “정말 매일 같이 나를 챙겨줬다. 언제여도 상관없으니 편하게 돌아와도 된다는 따뜻한 말은 물론 건강식품, 과일 등을 계속 보내주더라. 잘하지 않으면 안되겠다는 생각이 저절로 들었다”고 웃었다.
선배로서 책임감도 녹아들었다. 정대영은 “무엇보다 여자 선수들이 출산 이후로는 더이상 선수의 길을 걸을 수 없다는 선입견을 깨고 싶었다. 포기하고 싶은 순간도 많았지만, 내가 여기서 무너지면 다른 후배들의 길도 자연스럽게 막힐 거라 생각했다. 이 악물고 버텼다”고 힘줘 말했다.
성치 않은 몸을 이끌고 부산히 움직였다. “매일 요가를 다니고, 추운 겨울에 옷 잔뜩 싸매면서까지 운동장을 걷고 뛰었다”는 그의 근성은 자연스럽게 잠자던 승부사 기질도 깨웠다. 그는 “다시 운동을 시작하니 조금씩 옛 생각이 났다. 오랜 시간 단체 생활을 하며 운동만 했던 사람이지 않나. 휴가 기간에 외롭다는 느낌도 받았다. 함께 훈련하고 코트 위에서 승부를 펼치는 순간이 그리워졌다. 그때 진짜 꼭 복귀하겠다는 다짐이 섰다”고 미소 지었다.
한국도로공사 시절의 정대영이 2022∼2023시즌 여자부 챔피언결정전에서 우승을 차지하고 기뻐하고 있다. 사진=KOVO 제공 결실은 달콤했다. 위기를 딛고 돌아온 여자배구 최초 ‘엄마 선수’의 활약은 무려 14시즌 동안 계속됐다. 녹슬지 않는 중원의 기둥으로 빛났다. 많은 나이에도 한국도로공사로 FA 이적을 이어가며 능력을 증명했고, 2022~2023시즌에는 최초의 챔프전 리버스 스윕이라는 뜻깊은 처음을 새기기도 했다.
정대영은 “커리어 마지막 우승이 된 그 순간은 잊을 수가 없다. 실감이 안 났다. 아직도 마지막 5차전을 이기고 관중석을 바라봤던 때가 떠오른다. 힘든 순간들이 많았지만, 여기까지 달려오길 잘했다는 생각이 들었다”며 “축하도 정말 많이 받았다. 특히 후배들이 연락와서 ‘언니가 아직도 이렇게 잘해주고 있는 덕에 나도 아이 낳고도 선수하고 있다. 그만두지 말고 계속 같이 배구하자’는 말을 해줄 때가 가장 감동적이고 뿌듯했다”고 웃었다.
◆지도자로, 엄마로
정대영(오른쪽)과 그의 딸 김보민 양이 정대영의 은퇴식에서 소감을 전하고 있다. 사진=KOVO 제공 선수 정대영의 마침표는 끝내 찾아왔지만, 그의 도전은 멈추지 않는다. 지도자 정대영, 엄마 정대영이라는 다음 단계가 기다리고 있기 때문이다. 제천여중 코치로 제2의 인생 서막을 열었다. 그는 “선수 시절보다 더 노력해야 한다. 아이들이 내가 생각하는 배구를 이해하고 몸으로 하게끔 만드는 게 정말 어렵더라. 더 많은 에너지를 쏟는 요즘이다”며 “힘들긴 한데 아이들이 성장하는 걸 보면 기분이 뭉클하다. 대회에서 성적을 내고 하면 내 일처럼 기쁘다. 내가 힐링 받는 기분”이라는 근황을 전했다.
이어 “훈련할 때는 강하고 정확하게 가르침을 주고, 그 외로는 아이들과 잘 융화되고자 한다. 때로는 친구, 엄마 같은 존재가 되고 싶다. 공과 사를 확실하게 구분해야 배구 실력이 올라간다. 운동량이 많아져서 아이들이 힘들겠지만, 좋은 선수가 되려면 기본기가 중요하다. 요즘 선수들은 프로에 와서도 기본기가 부족해서 기초 훈련하다가 시간을 허비한다. 한국 배구가 발전하려면 학생 때부터 이런 점들이 확실하게 보완돼야 한다”고 목소리를 높였다.
정대영 제천여중 코치가 아이들을 코칭하고 있다. 사진=본인 제공 엄마로서의 삶도 놓칠 수 없다. 은퇴를 결심했던 배경에도 가족, 특히 딸과의 시간을 보내고 싶었다는 열망이 자리했다. 마침 지도자 정대영과 엄마 정대영의 삶의 궤도는 일치한다. 딸 보민 양이 어린 시절부터 배구선수의 꿈을 품고 성장 중이기 때문이다. 그가 제천여중 코치로 출발한 것도 보민 양을 가르치던 김민관 제천여중 감독의 권유가 있었기에 가능했다.
정대영은 “딸이 팀에 있어서 더 조심스러웠다. 다른 학부모님들 보시기에 편애처럼 보일 수도 있지 않겠나. 더 매정하고 무섭게 대했다. 집 갈 때마다 잘못된 점을 짚어주곤 한다. 딸 아이가 ‘엄마 너무 무서워서 그만두고 싶다’고 했을 정도”라고 웃는다.
“딸이 이제 올해를 끝으로 중학교를 졸업하고, 내년부터는 포항여고로 간다. 은퇴하고 1년 넘게 같이 살다가 또 떨어지게 됐는데, 선수로서의 미래를 위해 결정을 내렸다. 같이 지내다보니 서로 자유의 시간도 다시 필요해졌다”는 농담 속에 딸을 향한 애틋함을 담는다. 그는 “나 때문에 딸이 많이 부담 될 거다. 그래도 철이 빨리 들어서 엄마보고 먼저 ‘힘들어 하지 마’라고 해준다. 고맙고 또 미안한 마음”이라며 “고등학교 가면 더 힘들 거다. ‘더 많은 노력이 필요하다. 네 인생은 네가 책임져라’고 말했다. 잘 이겨냈으면 하는 마음”이라고 목소리를 높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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정대영 제천여중 코치(가운데)가 배구 꿈나무들과 기념촬영을 하고 있다. 사진=본인 제공 인생 후반전이 이제 시작된 시점, 가야할 길은 아직 많이 남았다. 그는 “언제가 될지는 모르겠지만, 당연히 프로팀 지도자도 생각을 하고 있다. 이제 은퇴한 지 1년 남짓이다. 밑에서부터 차근차근 배워가는 단계다. 유소년 선수들을 가르치는 게 큰 공부가 된다”며 “주변에서도 ‘준비 잘하고 있어라’는 말을 해주신다. 사실 치열했던 선수 시절을 끝내고 배구를 잘 안 봤는데, 요즘은 다시 챙겨 본다. 코트 위에서 뛰는 승리를 쫓는 순간이 그리울 때가 있다. 지금에 최선을 다하다 보면 언젠가 기회가 오지 않겠나”라고 웃었다.
마지막으로 그는 “어느 자리든 정대영이라는 이름에 담아온 가치를 지키는 데 집중하고 싶다. 화려한 순간도 있었지만 그보다 나는 꾸준한 사람이었다. 앞으로도 어디서든 제 역할을 잘해냈던 사람으로 기억되고 싶다”며 “보민이에게도 항상 버팀목으로 남아있는 엄마이고 싶다. 인생은 배구와 똑같다. 만약 보민이가 프로에 못 가더라도, 우리는 그 다음 플레이를 하면 된다고 말한다. 보민이의 플레이를 돕는 조력자로 살아가고 싶다”고 활짝 웃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