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국과 미국이 지난 14일 관세·안보 조인트 팩트시트(공동 설명자료)를 발표하면서 한국의 핵추진잠수함(핵잠) 보유가 한·미 간 문서에 공식적으로 등장했다. 다만 팩트시트에는 구체적인 내용은 없었다. 정치적 결정만 내려졌을 뿐 실무 문제를 해결하기까지는 많은 시간이 걸릴 것이라는 관측이 나오는 대목이다. 핵잠 전력화에 이르는 모든 단계를 통과하려면 미국의 협상·승인 등이 필요하다는 점에서 ‘자주국방’ 대신 ‘동맹 일체화’를 강화하는 결과로 이어질 수 있다는 지적도 제기된다.
2023년 12월 17일 부산작전기지에 미국의 핵(원자력) 추진 잠수함 '미주리함(SSN-780)'이 입항해 있다. 연합뉴스 ◆난관 많은 필리조선소 건조 정부는 핵잠의 국내 건조를 강조하고 있다. 위성락 국가안보실장은 이날 브리핑에서 “배(선체)는 여기(국내)에서 짓고, (핵잠용 소형) 원자로도 우리 기술로 할 수 있다”며 “건조 위치는 일단 (국내로) 정리됐다고 본다”고 말했다.
하지만 도널드 트럼프 미 대통령은 필리조선소 건조 방침을 밝혔다. 팩트시트에도 건조 장소와 주체는 언급되지 않았다.
필리조선소는 군함 건조 기반이 없고 상선을 만드는 곳이다. 핵잠 건조를 위해선 도크와 공장, 핵 차폐 시설과 보안 설비 등을 갖춰야 한다. 거액을 투입해야 한다는 의미다. 막대한 비용을 들여 기반을 갖추고 핵잠을 만들려면 미국 정부가 필리조선소를 방위산업체로 지정해야 한다. 이는 미국 정부의 고강도 통제와 보안 정책 적용으로 이어질 가능성이 크다. 이로 인한 일정 지연 등을 방지하려면 미 해군 핵잠 건조로 기술과 경험을 쌓은 미국 업체들을 참여시킬 수밖에 없다.
미국 업체 참여가 늘면 미국 기술 비중도 증가한다. 미국산 핵잠을 들여와서 운용하는 결과가 될 수도 있다. 거액을 쓰고도 산업적 효과는 떨어지며 일정 지연 등의 리스크를 관리하기도 어려운 셈이다. ‘동맹 일체화’에는 도움이 되지만 우리 힘으로 전략무기를 만드는 ‘자주국방’의 의미가 약해질 우려도 제기된다.
美 해군총장, 마스가의 심장 울산찾아 대릴 커들 미국 해군참모총장(앞줄 왼쪽에서 세 번째)이 지난 15일 HD현대중공업 울산 조선소에서 정기선 HD현대 회장(〃 두 번째) 등과 함께 야드를 둘러보며 건조 중인 함정에 대한 소개를 듣고 있다. HD현대 제공 ◆신속한 국내 건조, 쉽지 않아 위 실장은 핵잠 건조 일정에 대해 “목표 시기가 특정돼 있지 않지만 대개 (건조에) 10년 가까이 걸리는 것으로 알고 있다”며 “빨리 시작해서 시기를 앞당겨야 하지 않겠나”고 말했다. 속전속결 방식을 언급한 셈이다.
국내 조선소는 디젤잠수함 관련 설비와 인력이 있다. 투자를 통해 국내 기술을 새롭게 개발하는 효과도 있다. 필리조선소보다는 여건이 다소 낫지만, 핵잠 건조 경험이 없는 상황에서 시행착오와 리스크가 불거질 우려가 크다. 원자로의 경우엔 핵연료 농축률에 따라 설계·제조 난도가 다르다. 농축률이 80% 이상이면 원자로 소형화·경량화가 쉽고 연비도 좋지만, 20% 미만이면 크기와 무게가 늘어난다. 이는 잠수함 배수량에도 영향을 미친다. 핵연료 관련 협상 결과에 따라 잠수함과 원자로 크기·성능 등이 결정되는 셈이다.
잠수함의 핵심인 저소음 성능 구현도 문제다. 국내에선 디젤잠수함 관련 저소음 기술은 있지만 원자로와 추진체계에서 발생하는 소음을 낮추는 것은 또다른 문제다. 양욱 아산정책연구원 연구위원은 “핵잠은 원자로에서의 소리를 얼마나 줄이느냐가 핵심기술”이라면서 “중국도 수십년을 노력했는데 미국을 못 따라간다. 그러니 중국 핵잠을 두고 소음이 크다는 뜻에서 ‘바다의 경운기’라는 말이 나온다”고 설명했다.
일각에선 미국의 기술 이전을 통해 리스크를 낮추는 방안도 거론된다. 하지만 원자력 관련 기술을 놓고 배타적인 우위를 유지하려는 미국 정부의 기조를 감안하면 쉽지 않다는 분석이 나온다. 유지훈 한국국방연구원 선임연구원은 “미국은 핵추진 체계와 연료 관련 기술을 극도로 엄격히 관리하고 있어 기술이전 범위가 제한될 가능성이 있다”고 지적했다.
박수찬·장민주 기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