영화 ‘사람과 고기’는 오랜 기다림 끝에 관객을 만났다. 임나무(사진) 작가가 시나리오를 완성한 것은 약 11년 전. 그의 노트북 속에서 오랫동안 잠자던 이야기는 제작사 도로시 장소정 대표를 만나며 비로소 영화로 만들어져 극장에 걸렸다. 대형 투자사와 배급사 없이 지난 10월 개봉한 독립영화는 상영관 확보에 어려움을 겪었고, 입소문에도 불구하고 ‘상영하는 곳이 없어 보고 싶어도 볼 수 없는 영화’가 됐다. 그럼에도 소수 극장에서 약 4만1000명의 관객을 모았다. 이 작품으로 임 작가는 올해의 여성영화인상과 한국영화제작가협회상 각본상을 동시에 거머쥐었다. 단독 크레디트로 개봉한 첫 장편영화로 거둔 성과다. 임 작가를 18일 서울 종로구 한 카페에서 만났다.
영화 ‘사람과 고기’ 속 한 장면. 트리플픽쳐스 제공 ‘사람과 고기’의 출발점은 일상의 장면이었다. 서울 광화문에 살던 그는 성신여대 인근, 지인의 요가원 무료 수업을 듣기 위해 매일 같은 시각 버스를 탔다. 그리고 늘 같은 장소에서 폐지를 가득 싣고 언덕을 오르내리는 한 노인을 마주쳤다. ‘저렇게 몸을 쓰려면 고기를 먹어야 할 텐데’라는 생각이 스쳤다. 운동을 하겠다고 먼 길을 오가는 자신의 모습과, 생계를 위해 온종일 걷는 노인의 모습이 겹쳐 보이기도 했다.
영화 ‘사람과 고기’의 각본가 임나무 작가. 이제원 선임기자 ‘저 노인이 고기를 먹으려면 어떻게 해야 할까.’ 그는 ‘고기를 먹는 폐지 줍는 노인’을 주인공으로 시나리오를 쓰기 시작했다. 초고는 단 3일 만에 완성했다. “손가락에 모터가 달린 것처럼 써졌다”고 그는 회상했다. 별도의 취재는 하지 않았다. 임 감독이 붙든 확신은 하나였다. ‘몸은 늙어도 마음은 늙지 않는다’는 믿음이었다. 노인 특유의 어투를 세세히 재현하려 애쓰지도 않았다. 이렇게 쓴 시나리오는 장용, 박근형, 예수정 세 명의 걸출한 배우를 만나 생명력을 얻었다. 배우들은 자신의 언어로 대사를 조금씩 바꾸며 자연스럽게 인물을 완성해냈다. 양종현 감독과 연출부 스태프는 추가 취재로 완성도를 높였다.
영화 속 노인 3인방은 폐지를 줍거나 길거리에서 채소를 파는 가난한 이들이다. 이들은 고깃집에서 상습 무단 취식을 하다 덜미를 잡힌다. 가난한 노인이 등장하는 독립영화이니 칙칙하고, 무겁고, 느릴 것이라는 선입견이 생기기 마련이지만, 영화는 이런 예상을 완전히 비껴간다. 대사는 유머러스하고, 폭소가 터지는 장면이 많다. 영화의 톤을 규정한 것은 임 작가의 유머 감각이다. “항상 남을 웃기고 싶은 욕심이 있고요, 유머는 제가 삶을 사는 방식이기도 해요. 힘든 이야기도 웃기게 포장해요. 듣는 사람이 웃으면 저도 웃게 되잖아요.” 지난 6월 뉴욕 트라이베카 영화제에서 ‘사람과 고기’ 월드 프리미어 상영 당시, 관객들이 “너무 빵빵 터져서” 임 작가조차 놀랐다고 한다.
한국예술종합학교 영화과에서 연출을 전공한 그는 실기 위주의 학부 교육을 받았으니 이론을 공부하겠다는 마음으로 프랑스로 떠났다. 파리 3대학에서 프랑스 감독 에릭 로메르(1920∼2010)를 주제로 박사 논문을 준비했지만, 글은 뜻대로 써지지 않았다. 현지 광고 프로덕션에 몸담았고, 학업을 중단한 뒤 귀국해서는 홍상수 감독 연출부 등 현장에서 경험을 쌓았다. 감독 데뷔를 준비하며 시나리오를 다듬었지만, 수 년을 끌다 프로젝트는 무산됐다. 그 시기 생계를 위해 택한 것이 통번역이었다. 이화여대 통번역대학원을 졸업하고 통번역사로 활발히 활동했다. ‘사람과 고기’ 역시 통번역 일을 하던 시절에 쓴 작품이다. 생활비를 벌기 위해 그가 온갖 공모전에 도전하던 코로나19 팬데믹 시기, ‘사람과 고기’는 2021년 SBS문화재단 드라마 공모전에서 단막극 가작으로 선정됐다. 드라마 제작은 무산됐지만, 다행히 각본은 영화화로 이어졌다.
여전히 임 작가의 노트북에는 영상화를 꿈꾸는 각본 파일이 가득하다. 현재는 OTT 드라마를 집필 중이다. 영화와는 전혀 다른 성격의 작업이라, 공부하며 쓰고 있다고 그는 설명했다.
그는 성실한 루틴형 인간이다. 매일 아침 7시에 카페에 도착해 글을 쓰고, 운동을 한 뒤 다른 카페나 집으로 이동해 작업을 이어간다. 첫 작품에서 보여준 그의 빼어난 글이 앞으로 어떤 작업으로 이어질지 더욱 궁금해지는 이유다. 이규희 기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