헤어진 연인은 시간이 한참이나 흐른 뒤에도 같은 감정의 언어를 공유할 수 있을까. ‘좋은 이별’이란 과연 가능한 것일까. 영화 ‘만약에 우리’(31일 개봉)는 이 질문에서 출발한다. ‘82년생 김지영’(2019)으로 동시대 감정을 섬세하게 포착했던 김도영 감독이 중국 멜로 영화 ‘먼 훗날, 우리’(2018)를 한국적 정서로 리메이크했다. 원작에서 정백연·주동우가 연기했던 연인은 구교환과 문가영이 맡았다.
영화는 10여년 전 뜨겁게 사랑하다 헤어진 연인 은호(구교환)와 정원(문가영)이 태국에서 인천으로 향하는 비행기 안에서 우연히 재회하는 순간으로 문을 연다. 강산이 바뀔 만큼 시간이 흘렀지만, 여전히 익숙한 얼굴을 마주한 두 사람은 속절없이 미소 짓고 만다.
중국 영화 ‘먼 훗날 우리’를 리메이크한 멜로 영화 ‘만약에 우리’가 31일 개봉한다. 10여년 전 연인이었던 ‘은호’(구교환·오른쪽)와 ‘정원’(문가영)이 우연히 재회해 지난 사랑과 이별, 고단했던 청춘 시절을 돌아본다. 쇼박스 제공 10여년 전, 상경한 대학생이던 두 사람은 고향으로 향하던 고속버스에서 처음 만났다. 서울에서 함께 살며 수년간 사랑을 나눴지만 각자의 현실 앞에서 헤어진다. 영화는 만남에서 이별까지의 과거와, 모든 것이 끝난 뒤의 현재를 교차 배치하며 감정을 축적해간다. 원작 영화와 마찬가지로 과거는 컬러, 현재 장면은 흑백으로 표현된다. 고아원에서 자란 정원은 ‘집’에 대한 갈망이 유난히 큰 인물이다. 마음의 안식처이자 물리적 공간으로서의 집을 동시에 꿈꾸며 건축사를 목표로 삼지만, 현실은 뜻대로 흘러가지 않는다. 여건에 맞춰 사회복지학과에 진학한 그의 삶에는 늘 불안이 깔려 있다.
공학도인 은호의 꿈은 보다 이상적이다. “게임 개발로 100억 벌기”. 취업 대신 자기 스타일의 게임으로 성공하고 싶어 하지만, 기회는 좀처럼 오지 않는다. 젊고 가난한 연인에게 서울살이는 냉혹하다. 생계를 위해 돈을 벌다 보면 꿈을 좇을 시간은 줄어들고, 꿈을 붙들수록 현실은 더 팍팍해진다.
영화의 주요 배경은 2000년대 말∼2010년대 초. ‘88만원 세대’ ‘삼포세대’ 등의 단어가 널리 쓰이던 시기, 침체한 사회적 공기 속에서 미래를 쉽게 상상할 수 없던 청년들의 불안과 좌절이 작품 전반에 배어 있다.
서울의 풍경 역시 상징적으로 활용된다. 고층 빌딩과 아파트 단지, 은호와 정원이 사는 언덕배기 빌라와 반지하 공간을 명확히 대비시키며, 두 젊은이가 마주한 현실의 간극을 시각적으로 드러낸다. 이들에게 서울은 사랑의 온기와 생존의 냉기가 공존하는 도시다.
대부분의 사랑은 아름답게 시작하지만, 끝은 늘 경황없다. 차분히 작별하는 연인은 드물고, 그래서 지난 사랑은 종종 미완의 감정으로 남는다. ‘만약에 우리’는 10여년 만에 다시 만난 옛 연인에게 과거를 돌아볼 시간을 허락한다. 그 시간을 통해 영화는 슬며시 말한다. 지난 사랑을 통해 우리는 성장했다고. 그 사람이 곁에 없는 지금도 잘 살고 있지만, 그 사람이 처음부터 없었다면 아마도 다른 삶을 살았을 것이라고. 이 영화에는 누구나 한 번쯤 지나온 옛 인연을 떠올리게 만드는 힘이 있다. 정원의 싸이월드 배경음악으로 흐르던 가수 임현정의 ‘사랑은 봄비처럼 이별은 겨울비처럼’은 엔딩 크레디트에 다시 한번 흐르며 긴 여운을 남긴다. 2000년대 한국 멜로 영화의 황금기를 장식했던 ‘봄날은 간다’(2001) 속 김윤아가 부른 ‘봄날은 간다’, ‘클래식’(2003)에서 쓰인 자전거 탄 풍경의 ‘너에게 난 나에게 넌’처럼, 영화와 함께 기억될 OST로 자리할 만하다.
구교환은 ‘D.P.’ ‘탈주’ 등 개성 강한 캐릭터로 각인돼온 배우다. 멜로 장르에서의 얼굴이 기대를 모았던 이유다. 결과적으로 이번 작품에서 그는 ‘찰떡 배역’이라는 인상을 남긴다.
19일 서울 종로구 한 카페에서 만난 구교환은 “은호와 만나 연애하다 헤어진 기분이라는 관객의 반응을 들었는데, 더할 나위 없는 최고의 칭찬이었다”며 “좋은 멜로 영화를 봤을 때 관객으로서 내가 느끼는 감정”이라고 말했다. 좋아하는 영화를 묻는 말에 오랫동안 홍콩 멜로 영화 ‘첨밀밀’(1996)을 꼽았다는 그는 “멜로만큼 모두가 잘 아는 감정도 없고, 동시에 가장 잘 모르는 것도 사랑”이라며 장르에 대한 애정을 드러냈다.
문가영은 이 작품을 “두 인물이 (인생을) 다음 페이지로 넘기는 정리와 해소의 순간을 담은 이야기”라고 설명했다. 그는 “한동안 한국에서 만들어지는 멜로 영화 많지 않았는데, 젊은 날에 멜로 영화를 찍어보는 경험은 여자 배우들에게 정말 소중하다”며 “이 작품이 잘 되어 많은 배우에게 기회가 확장되기를 바란다”고 말했다.
이규희 기자 lkh@segye.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