도널드 트럼프 미국 대통령이 유엔의 권위를 무시하고 유엔에서의 미국 역할에 회의적이란 점은 널리 알려진 사실이다. 극심한 재정난에 시달리는 유엔을 위해 트럼프 2기 행정부가 모처럼 지갑을 열었다. 하지만 ‘구(舊) 체제가 아닌 새로운 질서에 적응하지 않으면 죽을 것’이란 경고를 잊지 않았다. 새로운 질서란 트럼프가 신봉하는 ‘미국 우선주의’ 세계관이다.
29일(현지시간) 스위스 제네바 유엔 유럽사무소에서 제레미 르윈 미국 국무부 해외원조 담당 차관(왼쪽)과 톰 플레처 유엔 긴급구호 담당 사무차장이 양해각서(MOU)를 체결한 뒤 악수하고 있다. MOU에는 미 행정부가 유엔의 인도주의 프로그램 지원에 20억달러를 지원하는 내용이 담겼다. EPA연합뉴스 29일(현지시간) BBC 방송에 따르면 미 행정부는 이날 유엔의 인도주의 프로그램 지원을 위해 20억달러(약 2조8700억원)의 자금을 출연한다고 밝혔다. 조 바이든 행정부 시절인 2022년 한 해 동안 미국이 지출한 유엔 인도주의 프로그램 지원금이 170억달러(24조3900억원)라는 점을 감안하면 사실 20억달러는 그리 큰 돈은 아니다. 하지만 유엔을 무시하는 트럼프 행정부 출범 후 돈줄이 마른 유엔으로선 감지덕지할 만하다. 미 행정부의 발표는 스위스 제네바 유엔 유럽사무소에서 이뤄졌다. 대표적인 트럼프 충성파 관료로 알려진 제레미 르윈 국무부 해외원조 담당 차관이 톰 플레처 유엔 긴급구호 담당 사무차장과 만난 자리에서 미 행정부의 자금 공여를 약속했다. 영국 외교관 출신인 플레처는 “그 돈으로 수백만명의 목숨을 구할 수 있을 것”이라고 미국에 환영와 감사의 뜻을 밝혔다.
다만 르윈은 이번 지원금에 까다로운 조건을 달았다. 아이티, 시리아, 수단 등 미국이 지정한 17개국을 위해 쓰여야 한다는 점이 그것이다. 르윈은 “아프가니스탄과 예멘을 위한 지원금은 없다”며 “트럼프 대통령은 미국인이 낸 세금이 테러 단체로 흘러드는 것을 결코 용납하지 않을 것”이라고 강조했다.
지난 9월 미국 뉴욕에서 열린 유엔 총회에 참석한 도널드 트럼프 미국 대통령이 세계 각국 대표단을 상대로 연설하고 있다. AP연합뉴스 르윈은 미국의 지원금을 기후 변화 대응 프로그램에 사용하는 것도 금지했다. 트럼프는 ‘기후 변화’라는 개념 자체를 인정하지 않는 정치인으로 유명하다. “기후 위기를 막아야 한다”고 외치는 지식인들은 트럼프가 보기엔 사기꾼일 뿐이다. 그가 올해 1월 두 번째 임기를 시작하며 가장 먼저 한 것도 ‘파리 협정’으로 불리는 유엔 기후변화협약에서 미국을 탈퇴시키는 일이었다. 이날 르윈은 유엔을 겨냥해 “미국의 돼지저금통은 낡은 체제로의 회귀만을 원하는 기구 및 조직들에겐 결코 열리지 않을 것”이라고 경고했다. 그러면서 “(트럼프가 주도하는 새로운 국제 질서에) 적응하거나, 그렇지 않으면 죽어야 한다”고 독설을 내뱉었다. 유엔의 방만한 운영을 질타하고 구조조정을 촉구한 셈이다.
르윈은 앞서 일론 머스크 테슬라 최고경영자(CEO)가 수장을 지낸 정부효율부(DOGE)에서 일하며 미국의 해외원조 사업을 관장하는 국제개발처(USAID)의 해체 및 그 소속 직원들의 해고를 주도한 것으로 전해졌다.
김태훈 논설위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