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939년 9월1일 어떻게 이럴 수 있을까! 전쟁이 일어났다”로 시작하는 이 책은 스웨덴 작가 린드그렌이 제2차 세계대전 시기 남긴 일기를 묶은 기록물. 린드그렌은 동화 ‘말괄량이 삐삐’(삐삐 롱스타킹)의 저자로, 스웨덴에서는 국민작가이자 양심의 상징으로 존경받아 지폐에도 얼굴이 실린 인물이다. 작가로 널리 알려지기 전 그는 우편검열 업무를 맡아 전쟁을 둘러싼 유럽 정세와 각종 정보를 접할 수 있었고, 그 과정에서 위태로운 중립국 스톡홀름의 일상과 전황을 꾸준히 기록했다.
이 일기는 훗날 후손 결정으로 출간됐다. 독일 제3제국에 둘러싸인 중립국에서 전쟁을 피해 간 지성인이 겪는 내적 갈등이 생생히 드러난다. 국내 독자들이 주로 미국 중심의 시각을 통해 제2차 세계대전을 접해 온 현실을 감안하면, 당대 유럽인의 감각으로 전쟁의 고통과 피해를 다시 바라보게 만드는 책이기도 하다. 독일은 물론 러시아에 대한 스칸디나비아 반도인의 트라우마가 반복적으로 드러나는 대목에서는 현대에 들어와서 우크라이나 전쟁 이후 폴란드를 비롯한 주변국들이 왜 그토록 재무장에 속도를 내는지 자연스럽게 이해하게 된다.
아스트리드 린드그렌/ 이명아 옮김/ 시공사/ 3만2000원 가족을 오스트레일리아·뉴질랜드로 대피시키는 문제부터 커피가 점점 귀해지는 사소한 변화까지, 전쟁이 일상을 잠식해 들어가는 장면들이 촘촘히 쌓인다. 덕분에 독자는 전쟁을 ‘전선’의 사건이 아니라 도시의 생활 구조가 변형되는 과정으로 읽게 된다. 스웨덴은 중립국으로서 전쟁이 문 앞까지 다가온 상황에서 중립을 유지하기 위해 타협과 조정, 후퇴를 거듭했다. 린드그렌의 일기는 그 과정이 시민의 감각 속에서 어떻게 번역되는지를 보여준다. 유대인 학살 소식 앞에서 느끼는 무력감과 전쟁이 길어질수록 감각이 무뎌지는 공포, 아이들과 가족을 지키고 싶은 본능과 세계 시민으로서의 책임 사이의 균열이 반복적으로 드러난다.
이 일기가 특별한 이유는 전쟁을 ‘사건’이 아니라 ‘지속되는 상태’로 포착하기 때문이다. 공습에 대비한 대피소 표지판이 생활의 일부가 되고, 엘리베이터 안의 경고문을 무심히 지나치게 되는 순간들은 전쟁이 인간의 감각을 어떻게 재조정하는지를 증언한다. 린드그렌은 언젠가 손주들이 “대피소가 뭐예요?”라고 묻게 된다면 그때가 진정한 평화일 것이라고 적는다. 전쟁의 끝은 총성이 멎는 순간이 아니라, 일상에서 공포의 언어가 사라지는 시점이라는 통찰이다.
동시에 이 기록은 ‘삐삐 롱스타킹’의 탄생을 거꾸로 이해하게 만든다. 폭력과 권위, 강자의 논리가 세계를 지배하던 시기에 린드그렌이 아이들에게 건넨 것은 힘의 전복과 자유의 상상이었다. 전쟁 속에서도 어린이의 세계를 지키려는 그의 집요한 관심은 결코 현실 도피가 아니라, 가장 근본적인 저항의 형식이었음을 이 일기는 설득력 있게 보여준다.
박성준 선임기자 alex@segye.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