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자크 디네센 ‘바베트의 만찬’(‘바베트의 만찬’에 수록, 추미옥 옮김, 문학동네)
노르웨이 피오르 지역의 한 작은 마을, 노란색 집에서 나이 많은 두 자매가 살고 있었다. 목사였던 아버지가 돌아가시자 마을 신도들이 자매들을 목사 대신으로 여겨 노란 집에서 여전히 성경을 읽고 공부했다. 자매의 깊은 신앙심과 선한 마음을 사람들은 알고 있었으니까. 자매들의 세례명은 각각 마르티네와 필리파. 오래전 이 마을에 한 젊은 장교가 왔다가 마르티네에게 마음을 빼앗겼고, 관광차 들렀던 오페라 가수는 필리파의 노래에 반해 파리로 함께 가길 원했다. 두 남성이 자매들에게 후광처럼 본 것은 “순수하고 고결한 삶의 희망”이어서 결국 물러날 수밖에 없었지만.
조경란 소설가 이렇게 배경 같아 보이는 남자들 이야기는 과거에만 머물지 않는다. 긴 시간을 다루고 있는 이 단편에서 자매의 집에 12년 전부터 프랑스 여인 바베트가 집안일을 돌보게 된 건 오페라 가수와의 인연으로, 그리고 결말에서 바베트가 누구이며 그녀가 만든 음식과 귀한 술을 구분하고 알아차리는 역할은 마르티네를 사랑했던 장교로 인물과 이야기는 필연처럼 이어진다. 처음에 자매들은 파리에서부터 찾아온 도망자 바베트를 집에 머물게 할 마음이 없었다. 가정부를 두는 건 사치스러운 일이고 음식은 최대한 간소하게 먹고 이웃들에게 나눠주고 있으니까. 바베트는 파리 여자라는 편견이 무색할 만큼 음식 재료를 아껴 살림 비용을 더 줄여주었고 얼마 지나지 않아 노란 집과 마을에서 중요한 일원이 되었다. 과거 이야기를 잘 안 하는 그녀가 어느 날 말했다. 예전에 프랑스에서 복권을 구입했는데 언젠가는 당첨될 수도 있다고. 자매들은 불안해졌다. 정말 그렇게 돼서 자신들의 훌륭한 요리사가 파리로 훌쩍 떠나버릴 것 같아서.
죽은 목사의 백번째 생일이 다가왔다. 자매들은 신도들과 기념하고 싶어서 오랫동안 이날을 기다려왔다. 그러나 경제적인 여유도 없는 데다 요즘 마을 사람들은 불화와 갈등으로 서로 냉담하게 지내는 터였다. 바베트의 복권에 당첨된 1만프랑이 우편으로 도착한 건 신실한 자매들에겐 상관없는 일이었다. 그런 9월의 어느 저녁, 바베트가 자매들에게 간절히 부탁했다. 생일 만찬을 자기 돈으로 차리도록 허락해 달라고. 만약 자매들이 프랑스 요리가 어떤 것인지 알았더라면 “이번 한 번만 진짜 프랑스 요리를 만들고 싶다”는 바베트의 부탁을 들어주지 않았을 텐데.
만찬 때 마을 사람들은 자신들이 먹는 음식에 대해 알지 못했다. 서로 싸워서 저녁만 먹고 갈 요량이었다. 한데 시간이 지날수록 “어떤 어려움 속에서도 서로 짐을 나누곤 했던 지난 시절”에 대해, 함께 경험한 기적 같았던 일들에 관해 이야기 나누기 시작했다. “먹고 마실수록 몸과 마음이 점점 더 가벼워졌다. ” 그 자리에 초대받은 사람, 이제 늙은 대령이 말했다. 이 요리와 술은 파리의 천재 요리사가 있는 식당에서 먹어본 것과 같다고. 그리고 대령은 은총에 관해 말했다. 지금처럼 우리의 눈이 번쩍 뜨이는 순간, 은총이 무한하다는 것을 깨닫는 순간에 대해서. 사람들은 서로 손을 잡고 웃고 눈물을 흘렸다. 서로의 가치를 다시 깨달은 듯.
만찬은 끝났다. 자매들은 바베트에게 고마워하며 1만프랑을 가진 부자가 되었으니 언제 이 집을 떠날 거냐고 물었다. “1만프랑은 다 썼어요.” 바베트에게서 깊은 위엄이 흘러나왔다. 자매들은 그제야 이해했다. 최고 요리사였던 바베트가 자기 자신과 신을 여기서 지내게 해준 자매들과 마을 사람들을 위해 최선을 다해 만찬을 준비했다는 것을, 그녀의 진심과 그 만찬으로 모두에게 은총과 같은 저녁을 보낼 수 있었다는 것을.
눈 오는 밤에 사람들이 촛대가 놓인 식탁에 모여 조용히 음식을 먹는 이미지. 가끔 홀연히 이 단편이 떠오르곤 한다. 어디에든 보이지 않는 은총을 베푸는 사람이 있고 은총을 받는 사람이 있다는 걸 알게 되어서일까. 좋아하는 일에 바베트처럼 한번은 최선을 다하곤 스스로를 예술가라고 깨닫고 싶어서일까. 눈에 띄지는 않아도 타인에게 은총과도 같은 필요한 일을 하는 사람으로 새해에는 살고 싶다. 비록 1만프랑을 손에 지닌 건 아니지만.
조경란 소설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