항경련제(항발작제)는 뇌전증은 물론 조울증, 편두통, 하지불안증후군 등의 치료에 널리 쓰이는 약물이다. 갑작스런 발작이 생기거나 퍼지는 것을 막는 작용을 한다. 하지만 임신 중이라면 항경련제 사용에 각별한 주의가 필요하다. 임신 초기 항경련제에 노출될 경우 선천성 기형 위험이 높아질 수 있어서다. 이런 우려는 국내 대규모 연구에서도 다시 한 번 확인됐다.
대한뇌전증학회 역학위원회(위원장 이서영)는 2013∼2021년 국민건강보험공단 모자(母子) 빅데이터(249만4958건)를 활용해 임신과 출산을 분석한 결과 임신 중 항경련제 노출이 아이의 선천성 기형 위험을 높이는 것으로 나타났다고 16일 밝혔다. 국가 단위 빅데이터에 기반해 산모와 태아 간 항경련제 사용의 영향을 체계적으로 분석한 연구는 이번이 처음이다. 연구 결과는 미국신경학회지(Neurology) 최신호에 발표됐다.
약 복용하는 임신부. AI 생성 이미지·연합뉴스 위원회는 임신 초기(마지막 월경일 이후 90일 이내)에 항경련제를 처방받은 5880명(0.24%)을 ‘노출군’으로 정의하고, 출생 후 1년 이내 선천성 기형 진단 여부를 추적했다. 이 결과 노출군에서 선천성 기형이 진단된 비율은 10.8%로, 항경련제에 노출되지 않은 임신의 기형 발생률(7.0%)보다 뚜렷하게 높았다.
이런 경향은 산모의 연령, 기저질환, 사회경제적 요인, 동반 약물 사용 등 다양한 교란 요인을 보정한 뒤에도 달라지지 않았다. 위원회는 임신 초기 항경련제 노출이 선천성 기형 발생 위험을 26% 높이는 것으로 추산했다.
발프로산이 포함된 병용요법에서는 선천성 기형 발생률이 17.7%로 증가했다. 보정 후 위험도는 2.06배에 달했다. 10개 항경련제를 대상으로 단독요법을 비교한 분석에서도 발프로산만 선천성 기형 위험을 46% 높이는 것으로 나타났다. 다른 항경련제들은 약간의 위험 증가 경향이 관찰되더라도 통계적 유의성은 확인되지 않았다. 더 나아가 발프로산은 하루 복용량이 500mg 이상일 경우 선천성 기형 위험이 57%까지 증가하는 ‘용량-반응 관계’도 확인됐다.
연구진은 이러한 위험 증가의 원인으로 발프로산이 임신 초기 신경관 형성에 중요한 엽산의 흡수·이용을 방해해 기능적 엽산 결핍을 유발할 수 있다는 점을 들었다.
배아 발달 과정에서 유전자 발현 조절을 교란하는 후성유전학적 영향과 세포분화 억제 작용 역시 선천성 기형 위험을 높이는 요인으로 지목했다.
다만 학회는 이번 연구 결과가 임신부에게 무조건 항경련제를 중단하라는 의미는 아니라는 점도 분명히 했다.
조절되지 않은 발작은 산모와 태아 모두에게 치명적일 수 있는 만큼 임신을 계획 중이거나 임신 중이라면 발프로산 사용을 피하고, 대체 약제를 검토해야 한다는 것이다.
산모가 복용하는 약물은 태아에게 많은 영향을 미친다. 게티이미지뱅크 한편 산모가 복용하는 약물은 태아에게 많은 영향을 미친다. 만일 임신계획 중 특정 질환치료를 위해 복용 중인 약물이 있다면 의료진과 상의해 안전한 약물로 미리 변경하는 것이 좋다. 중증여드름치료제로 쓰이는 ‘이소트레티노인’은 태아의 선천성기형을 유발하는 대표적인 약물이다. 식약처에 따르면 이소트레티노인 치료 중 또는 치료 종료 후 1개월 이내 임신될 경우 태아의 얼굴, 심장, 뇌 발달에 심각한 영향을 줄 수 있다.
뇌전증이나 편두통치료에 쓰이는 ‘발프로산’ 역시 주의해야 한다. 태아의 신경관결손(척추기형), 심장 기형, 얼굴 기형 위험을 증가시키고 출산 후 아이의 지능발달에 영향을 줄 수 있다.
이밖에도 ▲메토트렉세이트, 미코페놀레이트 등 면역억제제는 기형유발 가능성이 있다. 또 고혈압약 중 ▲ACE 억제제 ▲와파린(항응고제) ▲토피라메이트 등 일부 정신과 약물 ▲임신 후기 NSAID 복용 등도 태아에 영향을 줄 수 있다.
김기환 기자 kkh@segye.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