정호승
나는 패배가 고맙다
내게 패배가 없었다면
살아남을 수 없었을 것이다
살아남기 위해
패배한 것은 아니지만
나는 패배했기 때문에 살아남았다
한때는 패배했기 때문에
분노의 절벽에서 뛰어내리고 싶었으나
분노도 가을바람과 같은 것이었다
그래도 나는 무조건 항복하지는 않았다
인생의 패배자는 없다는 말도
믿지 않았다
내게 패배가 없었다면
나는 당신을 사랑할 수 없었을 것이다
내가 패배했기 때문에 당신은
나를 사랑할 수 있었다
-시집 ‘편의점에서 잠깐’(창비) 수록
●정호승
△1950년 경남 하동 출생. 1973년 대한일보 신춘문예로 등단. 시집 ‘슬픔이 기쁨에게’, ‘새벽편지’, ‘별들은 따뜻하다’ 등 발표. 소월시문학상, 정지용문학상, 편운문학상, 상화시인상, 가톨릭문학상 등 수상.
패배에 대하여 [詩의 뜨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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