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혁신의 심장, 기업연구소⑭]시대와 방향에 따라 변모…R&D 2.0시대 맞은 기업연구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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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혁신의 심장, 기업연구소⑭]시대와 방향에 따라 변모…R&D 2.0시대 맞은 기업연구소
편집자주성장 동력이 꺼져가는 한국 경제에 새로운 심장이 필요하다는 목소리가 높다. 기업들이 보유하고 있는 연구소들은 한때 우리 경제의 심장이었다. 하지만 더 이상 기업 연구소가 무엇을 들여다보고 있는지 관심을 기울이는 시선은 없다. 미국 IT업계의 맹주인 IBM은 '잃어버린 10년'을 딛고 부활했다. 핵심적인 비결에는 연구소 재건이 있다. 국내 굴지 대기업의 창업주들은 과거 '기술보국'을 이구동성으로 외쳤다. 산업계에선 창업주들의 정신을 되짚어 한국형 연구개발(R&D) DNA를 기업 연구소에 다시 심어야 한다는 주장이 나온다. 아시아경제는 글로벌 기업들의 연구소를 탐방해 이 시대 기술의 역할과 정책을 제언하는 시리즈를 4회에 걸쳐 싣는다.

시간이 흐르고 시장 흐름, 사회상이 변하며 우리나라 기업연구소는 새 국면을 맞고 있다. 바야흐로 '연구개발(R&D) 2.0'의 시대다.


인공지능(AI) 시대가 개막하며 관련 기술이 중시된 영향으로 R&D의 전초기지인 연구소의 입지는 옛날에 비해 더욱 강화됐다는 이견이 없다. 기업을 운영하는 사람이라면 누구든 R&D와 연구소를 빼곤 경영을 말하지 않는다. 어느 기업이든 연구소의 필요성을 절감하고, 정부도 연구소 설립과 지원에 만전을 기하고 있는 현재를 우린 목도하고 있다. 그런 가운데서 연구소의 운영은 다변화되고 있다. 3·4세대에 이른 기업 총수들의 성향과 방향이 달라진 영향이 크다. 기존 연구소를 강화, 세분화하거나 다른 연구소를 점찍어 품기도 한다. 이런 변화를 비판하는 목소리도 있다. 연구소 설립 초기의 철학과 기조는 연속성을 갖고 유지돼야 한다는 요구다. 연구소는 그 시대에 필요로 하는 기술 개발에 집중해야 하는 사명이 있다. 그래서 흐름은 따라야 한다. 철학과 기조도 유지돼야 하는 것도 맞다. 두 마리 토끼를 모두 잡아야 하는 숙제가 앞에 놓여 있는 것이다. 지금의 우리 기업 연구소들은 두 마리 토끼를 모두 잡을 수 있을까.


M&A·세분화로 기술 사냥

근래 우리 기업 중엔 기술 R&D를 인수·합병(M&A)으로 해결하는 사례가 적지 않았다. 하나의 '트렌드'로 자리잡혀 가는 분위기도 읽힐 정도다. 회사가 필요로 하는 기술을 직접 연구개발하기보단 이미 한발 앞서 해낸 회사 또는 연구소를 품는 방법을 택했다. 이는 직접 R&D에 나섰을 때 발생하는 비용에 비해 M&A가 더 적은 값을 치를 수 있고, 동시에 시장에서 증명된 인재도 확보할 수 있다는 '계산'에 따른 전략적인 행보로도 풀이된다.



현대자동차그룹은 2021년 6월 로보틱스 R&D에서 일본 혼다에 뒤처진 20여년을 단숨에 따라잡을 방법으로 미국 보스턴다이내믹스(BD) 인수를 택했다. 현대차는 당시 9960억원을 들여 세계에서 가장 빠른 기술 발전의 속도를 보여주는 BD를 편입했다. BD가 개발하는 휴머노이드 로봇 '아틀라스'는 백덤블링·고공점프처럼 놀라운 운동신경을 갖췄을 뿐 아니라 3개의 손가락을 이용해 섬세한 동작이 가능할 정도로 기술 수준이 올라왔다. 연내 미국 현대차그룹메타플랜트아메리카(HMGMA) 등 주요 생산시설에 아틀라스를 시범 투입할 예정이다.


자율주행·소프트웨어 R&D에도 행보가 두드러졌다. 2020년 미국 자율주행 스타트업 앱티브와 각각 20억달러(약 2조8000억원)씩 투자해 로보택시 기업 '모셔널'을 설립했다. 현대차그룹이 지금껏 모셔널에 들인 돈만 5조원에 이른다. 네이버 최고기술책임자(CTO)를 지낸 송창현 대표가 설립한 '포티투닷'을 인수하는 데 투입한 비용은 1조4000억원 이상이다. 2022년 인수한 포티투닷은 소프트웨어 중심 차량(SDV) 체계로의 전환을 담당하고 있다.



M&A를 통해 핵심 기술을 확보한 것은 삼성전자도 마찬가지다. 2014년 사물인터넷(IoT) 플랫폼 개발업체 '스마트싱스'를 인수해 스마트홈 서비스를 구현했다. 갤럭시 이용자가 애용하는 '삼성페이'는 2015년 인수한 모바일 결제업체 '루프웨이'의 기술이었다. 또 오디오 사업 강화를 위해 2017년 9조원을 들여 하만을 인수했고 8년 만인 지난 5월 미국 마시모의 오디오 사업 부문을 3억5000만달러(약 5000억원)에 인수하는 계약을 체결하기도 했다.


삼성은 자사가 보유한 자체 R&D 인프라를 조정하기도 했다. 시대적 흐름과 사업 방향에 맞춰 개별화·세분화했다. 현재 삼성은 삼성글로벌리서치가 시장 흐름을 파악해 경영전략을 짠다. 기술 개발에 대한 컨설팅 등을 맡고 디바이스경험(DX) 부문에는 삼성리서치연구소, 디바이스솔루션(DS) 부문에 삼성반도체연구소를 두고 각 부문에서 필요로 하는 기술을 개발토록 하고 있다. 전 분야에 걸친 기술 개발이 이뤄지던 삼성종합기술원은 DS 산하에서 반도체에 집중하고 있는 것으로 전해진다.


임형규 전 삼성전자 사장은 "이제는 완전히 새로운 사업 영역을 찾는 방식으로 기술 개발하는 시기는 지났다. 우리나라 전체적으로도 하지 않는 사업이 없을 정도로 패러다임이 넓어졌다"면서 "지금은 사업별로 차별화된 기술을 찾아야 하는 시점이 됐고 그런 관점에선 지금의 연구소들 변화는 바르게 가고 있다고 본다"고 했다.


철학의 쇠퇴·구조조정 대상 우려

변화의 바람이 불면 역풍이 있기 마련이다. 우리 기업연구소들의 현실 역시 그렇다. 근래 삼성전자의 '반도체 위기론' 평가와 관련해 연구소들이 요인으로 지목되기도 했다. 한때 최고를 자부하던 삼성종기원 등 연구소들이 제대로 운영되지 못해 반도체 기술 경쟁에서 밀렸다는 게 골자다. 과거 종기원에서 일한 바 있는 연구원 A씨는 "AI 파운데이션 모델 개발에 도전할 수 있는 인재와 장비를 갖추고도 메모리 공정에서 불량 찾는 일만 하는 게 현 종기원의 실정"이라며 "이런 연구는 삼성전자 내 반도체연구소 등 다른 조직에서도 충분히 할 수 있고 스타트업에 맡겨도 될 일"이라고 꼬집었다.


연구소는 근본적으로 생존을 위협받을 수 있는 조건들을 갖췄다. 회사가 어려워 조직을 재정비하고 구조조정을 할 때 연구소는 가장 먼저 정리를 검토해볼 수 있는 조직으로 꼽힌다. 무엇보다 당장 돈을 벌어다 줄 수 있는 조직이 아니란 점에서 더욱 그렇다. 임우형 LG AI연구원 공동원장은 LG AI연구원의 경우 LG의 계열사별 실적에 연구원의 AI 연구가 영향을 미친 '기여도'를 금액으로 환산해서 내부에서 측정하는 방식으로 연구원의 실적을 매기고 있지만, 이런 구조조정의 리스크가 있다는 데는 대체로 동의했다. 그러면서 AI 연구가 장기적으로 진행되는 점을 감안해 "중간에 사전점검하는 과정을 두는 것도 연구소 운영에 있어 매우 중요하다"고 했다.


대만은 연구소부터…"생각의 전환 필요"

고대역폭메모리(HBM)를 개발하고 이 시장에서 우리 기업들이 주름잡는 데 앞장선 김정호 카이스트(KAIST) 교수는 "연구소는 단기와 장기 목표의 조합 아래 운영돼야 한다"고 강조했다. 마냥 시간과 돈을 들여 좋은 기술이 나올 때까지 기다리던 옛날 연구소 시절은 끝났다는 것이다. 장기 목표를 향해 나아가면서 시시각각 변하는 흐름에도 대응, 단기 성과들도 내놓는 노력이 필요하다고 봤다. 연구소가 철학을 지키고 시장 흐름에 도태되지 않기 위한 원론적인 해결책으로 읽힌다.


이를 실현하기 위해서는 '생각의 전환'이 필요하다는 주장도 업계에선 나온다. 해외 사례들도 참조할 필요가 있다. 우리와 반도체 시장에서 경쟁하고 있는 대만은 대다수 기업이 공장보다 연구소를 먼저 짓는다. 세계 파운드리(반도체 위탁생산) 1위 TSMC도 시작점은 연구소였다. 대만 행정원 소속 공업기술연구원이 주춧돌을 놓고 초기 자금도 전액 출자했다. 대만에서는 연구소가 기업이 태동할 때 세워져 '인큐베이터' 역할을 도맡는다. 이후 자연스럽게 기업의 전진기지로 자리잡고 기조는 유지한 채 유연하게 운영된다. 공장에 앞서 연구소부터, 우리 기업들도 생각을 바꿔볼 때가 됐다.






백종민 테크 스페셜리스트 cinqange@asiae.co.kr
김형민 기자 khm193@asiae.co.kr
전영주 기자 ange@asiae.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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