지난 6일 타계한 고(故) 최창걸 고려아연 명예회장은 '하루하루의 변화'를 중시한 경영 철학으로 자원 빈국 대한민국에서 세계 1위 비철금속 제련 기업을 일궈낸 인물이다. 그는 생전에 "혁신이나 개혁은 이미 늦은 것"이라며 "매일 조금씩 발전해 나가면 큰 개혁이 필요 없다"고 말하곤 했다.
도전에서 탄생한 '온산의 기적'
1941년 황해도에서 태어난 최 명예회장은 고(故) 최기호 초대 회장의 장남으로, 서울대 경제학과와 미국 컬럼비아대 MBA를 마친 뒤 1974년 고려아연 창립을 주도했다. 당시 정부의 중화학공업 육성 정책에 따라 제련업을 맡았으나, 자금과 기술 모두 부족한 상태였다.
그는 세계은행 산하 국제금융공사(IFC)와 직접 협상에 나서 "7000만 달러가 필요하다"는 평가를 "4500만 달러면 충분하다"고 설득해 사업 자금을 확보했다. 공사 방식도 턴키가 아닌 '직구매·직시공'을 택했다. 자금과 기술이 부족한 환경에서도 1978년 울산 온산에 국내 최초의 대형 비철제련소를 완공시켰다.
무(無)에서 유(有)를 일군 그 도전정신은 이후 '온산의 기적'으로 불렸다. 고려아연은 100년 역사의 해외 제련소를 추월하며 세계 시장에 이름을 올렸다. 1980년대에는 기술연구소를 세우고 아연·연·동 통합공정을 구축했고, 1990년 기업공개(IPO)로 투명경영을 강화했다. 영풍정밀·서린상사·코리아니켈 등을 차례로 설립해 사업 기반을 넓혔다.
세계 1위로 이끈 정도경영
1992년 회장에 오른 최 명예회장은 "원칙에 어긋나는 일은 하지 말자"는 신념 아래 기본에 충실한 경영을 이어갔다. 단기 실적보다 기술력과 신뢰를 우선했고, 현장을 직접 챙기며 문제 해결의 답을 찾아갔다.
그의 리더십 아래 고려아연은 기술혁신과 글로벌화를 동시에 추진했다. 호주에 아연제련소 SMC를 세워 해외 거점을 확보했고, 퓨머·DRS 등 신공법을 도입해 효율과 환경성을 끌어올렸다. 아연 잔재를 시멘트 원료로 재활용하는 공정을 상용화해 제련업의 이미지를 바꿨다. 그 결과 아연 생산능력은 연 5만t에서 65만t으로, 매출은 114억 원에서 12조 원으로 성장했다. 시가총액은 20조 원에 육박했다.
최 명예회장은 "고려아연은 임직원 모두의 회사"라는 철학으로 노사화합의 문화를 만들었다. 이제중 부회장은 "명예회장님은 직원들을 가족처럼 대했고, 좋은 제도는 먼저 도입하자고 하셨다"고 회고했다. 그의 리더십 아래 고려아연은 창립 이래 단 한 차례의 노사분규 없이 102분기 연속 흑자를 기록했다. IMF 외환위기와 글로벌 금융위기 때도 구조조정이나 명예퇴직을 단행하지 않았다.
사람과 나눔, 그리고 변화의 유산
최 명예회장은 "물고기를 잡아주는 일보다 물고기 잡는 법을 알려줘야 한다"는 부친의 가르침을 평생의 신조로 삼았다. 1981년 명진보육원 후원을 시작으로 아동복지와 장학사업을 꾸준히 이어왔고, "기업의 이익은 반드시 사회에 환원돼야 한다"는 신념을 실천했다. 임직원 기본급 1%를 사회에 기부하는 운동을 제안하며 나눔의 문화를 조직 속에 뿌리내렸다.
그의 선행은 가족으로도 이어졌다. 부인 유중근 경원문화재단 이사장과 아들 최윤범 고려아연 회장까지 사회복지공동모금회 '아너소사이어티'에 가입해 '패밀리 아너'로 이름을 올렸다. 최 명예회장은 2013년 '대한민국 나눔국민대상' 국민훈장 동백장을 받으며 "베푸는 일은 기업의 또 다른 책임"이라 말했다.
2002년 경영 일선에서 물러난 뒤에도 그의 시선은 늘 미래를 향했다. 신기술 개발과 도시광산(리사이클링) 사업에 매진하며, 자원 순환 산업을 새로운 성장 축으로 키워냈다. 폐배터리와 전자 스크랩에서 금속을 회수하는 기술은 고려아연의 핵심 사업 중 하나로 발전했다. 그의 경영철학은 한 문장으로 요약된다. "도전하되 성실하게, 변화를 멈추지 말라." 그 정신은 지금도 고려아연 공장의 굴뚝 속에서 이어지고 있다.
조성필 기자 gatozz@asiae.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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