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조경란의얇은소설] 애쓰는 사람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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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조경란의얇은소설] 애쓰는 사람들
기억을 더 잃지 않으려는 아버지 새어머니와 아들 그리고 노숙인 모두 각자의 방식으로 삶 버티며 자신과 서로를 위해서 고군분투
웰스 타워 ‘중요한 에너지의 집행자들’(‘유린되고 타버린 모든 것’에 수록, 이상원 옮김, 현대문학)

웰스 타워의 단편 ‘중요한 에너지의 집행자들’을 예전에는 병명도 제대로 확인되지 않은 기억 장애를 앓고 있는 아버지와 성인이 된 아들의 갈등을 다루는 이야기로 읽었던 듯하다. 이번에 다시 읽으니 그것은 표면의 줄거리일 뿐, 새로운 점들이 눈에 띄었다. 일단 첫 문장 후 바로 시작되는, 늦은 시간에 아들에게 전화한 새어머니의 대사에 주목하지 않을 수 없었다. “네가 곁을 주지 않은 사람들에 대해 생각해 본 적이 있니? 난 그 사람들과 처음부터 다시 시작하고 싶구나.” 그리고 새어머니는 아버지를 데리고 뉴욕으로 오겠다고 했다. 의사 말이 아들과의 만남이 아버지에게 도움이 될 거라고.
조경란 소설가 그녀의 대사로 미루어보면 아마도 이 단편을 다 읽고 나면 내가 곁을 주지 않은 사람들에 대해 돌아보게 되겠구나, 짐작하게 된다. 그 사람이 어쩌면 가족 구성원 중 한 명이며 부모일 가능성이 클 거라고. 또한 새어머니라는 인물이 지금 어떤 노력을 하고 있는 게 느껴진다. 한집에 사는 자신도 기억하지 못하는 남편을 데리고 먼 거리로 여행하겠다는 결심은 쉬울 리가 없으니까. 새어머니 마음과 달리 아들 버트는 이 방문이 성가시게 느껴졌다.

기억 손상이 오기 전, 법률회사에서 근무했던 아버지는 워싱턴스퀘어 공원에서 노숙인과 체스를 두고 있었다. 체스. 아버지는 한때 새 아내 일로 힘들었던 시절에 버트와 주말마다 체스를 두며 시간을 보내기도 했다. 체스에 관해서라면 승부욕이 있었고, “낯선 사람들과 거리낌 없이 잘 어울리는 것”이 아버지의 장점 중 하나였다. 지금 아버지는 체스에 몰두해 있었고 버트는 “비록 비숍 말 두 개와 기사 말 하나에 꼼짝없이 왕이 포위된 판세”였지만 아버지가 이기기를 바랐다. 못 본 사이에 더 늙고 구부정한 노인처럼 보이는 아버지가. 새어머니 역시 아버지만큼이나 나이 들고 지친 모습이었다.

승리에 도취한 아버지가 우겨서 내기 체스로 밥벌이를 하는 노숙인까지 함께 고급 식당으로 가게 됐다. 저녁 식사 자리는 버트의 불안처럼 우스꽝스러운 시간이 되고 말았다. 시작은 아버지의 질문에서였을까. 버트의 커피추출기를 내려다보면서 아버지는 세상을 바꾸는 직업을 가지라며 못마땅해했다. 아들은 그런 아버지에게 열심히 설명했다. “보이지 않을 정도로 작은 기술들, 예를 들어 전자열쇠라든가 볼펜, 면봉 같은 것들이 우리 삶을 얼마나 크게 바꿔놓았는지”, 그러한 일을 하는 사람, 자신과 같은 일을 하는 사람들은 “중요한 에너지의 집행자”라 할 수 있다고.

불편한 자리를 마치고 나왔지만 문제는 남아 있었다. 아버지 때문에 화가 나 먼저 식당을 나가 버린 새어머니를 찾는 일. 바람도 불고 택시도 안 잡히는 뉴욕 거리에서. 체스를 둘 때도 식당에서 노래를 불러줄 때도 매번 돈을 요구했던 노숙인이 제안했다. 자신의 자동차를 가져올 테니 이십 달러를 달라고. 버트는 돈을 주면서도 그가 올 거라고 믿지 않는다. 단편에서 보조 인물을 끝까지 놓치지 않는 작가를 만나면 기쁘기까지 하다. 우려와 달리 노숙인은 차를 끌고 왔다. 세 사람은 추운 거리에서 방황하고 있을 새어머니를 찾으러 출발한다. 짐이 가득 쌓인 차 안에서 굴러다니는 어느 도시의 미니어처 자동차 번호판에 쓰인 글씨를 보고 단어를 잊어버린 아버지는 그게 무슨 뜻이냐고 묻는다. 대답을 듣곤 아버지는 외우듯 말한다. “매력적인 땅”.

‘중요한 에너지의 집행자(Executors of Important Energies)’는 버트 한 명만이 아닌 듯하다. 기억을 더 잃지 않으려는 아버지, 자신의 힘으로 돈을 벌려는 노숙인, 곁을 주지 않았던 사람과 이제라도 다시 시작하려는 새어머니, 오늘을 무사히 보내고 싶어 하는 아들까지, 살기 위해 자신을 위해 서로를 위해 오늘을 위해 애쓰는 세상의 모든 이들. 그런 사람 한 명 한 명을 작가는 ‘중요한 에너지의 집행자’라고 부르고 싶어 한 것은 아니었을까.

조경란 소설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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