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맹수진의시네마포커스] 이젠 비인간 친척을 만들 시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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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맹수진의시네마포커스] 이젠 비인간 친척을 만들 시간
강원도 정선과 평창에 걸쳐 있는 가리왕산은 해발 1561m의 크고 아름다운 산이다. 가리왕산에 처음 올랐던 순간을 나는 기억한다. 신비로운 고목과 초록 이끼로 가득 덮인 원시 계곡에 홀려 산을 오르면서 미야자키 하야오의 애니메이션 ‘원령공주’의 배경인 야쿠시마가 전혀 부럽지 않다고 생각했었다. 그때의 감흥을 잊지 못해 올해도 두 번이나 가리왕산을 찾았음에도 이 신비로운 산에 파인 상처에 대해서는 깊이 생각해 보지 못했다.

김주영, 코메일 소헤일리 감독의 공동 연출작 ‘종이 울리는 순간’은 단 3일간의 평창 동계올림픽 경기를 위해 파괴된 천 년 숲 가리왕산의 아름다움과 가치, 개발이라는 이슈에 파묻힌 생명의 가치에 관해 묻는다. 생태학적 가치로 인해 일찍이 산림유전자원 보호구역으로 지정되었지만, 단 3일간의 올림픽 알파인 경기를 위해 가리왕산은 숲이 파헤쳐지고 10여만 그루의 나무가 베어지는 수모를 당했다. 올림픽 이후 원상 복구한다는 조건으로 스키 슬로프와 곤돌라가 건설되었지만, 올림픽이 끝난 뒤에도 약속은 지켜지지 않았다.
이 모든 파괴의 현장에 아파하는 영화는 그러나 자신의 생각을 강요하는 프로파간다가 아니다. 영화는 ‘정치적으로 올바른’ 노선을 기계적으로 따르지 않는다. 영화는 차라리 한 편의 시나 음악에 가깝다. 이 산이 얼마나 아름답고 신비로운지 말없이 보여주면서 멸종 위기에 처한 산 거주자들의 얼굴 하나하나를 소중하게 카메라에 담아낸다. 스키장 슬로프 건설을 위해 잘려 나간 가리왕산 신령 나무의 뿌리를 찾아내 위령제를 올리는 사람들의 슬퍼하는 얼굴을 담아내고, 2026년 동계올림픽 개최를 위해 베어진 이탈리아 코르티나의 헐벗은 산에서 살해된 나무와 생명을 위해 연주하는 첼리스트의 선율을 담아낸다.

물론 카메라는 개발을 원하는 지자체와 지역 주민들의 목소리도 귀를 기울여 경청한다. 그들을 악의 축으로 재현하는 손쉬운 해결책의 유혹에 빠지지 않는다. 그러나 사려 깊은 관찰과 경청 속에서 한 가지 사실만은 분명해진다. 올림픽 같은 글로벌 메가 이벤트는 각국 정치인과 국제올림픽위원회(IOC), 토건족을 위한 적자 잔치일 뿐 지역 주민들의 이익으로 이어지지 않는다는 사실이다. 대규모 산림 파괴와 인공 눈 없이는 불가능한 동계올림픽은 명백히 지속 불가능한 이벤트이다. 그런데도 IOC는 이러한 질문에 침묵한다. 점점 더 많은 사람이 깨닫기 시작한다. 기후 변화로 인해 2080년이면 기존에 동계올림픽을 개최했던 도시들의 행사 개최가 불가능하다는 사실, 이미 전 세계 유력한 후보 도시들이 동계올림픽 개최를 거부하고 있다는 사실. 그러한 불편한 진실 앞에서도 여전히 우리는 이 지속 불가능한 메가 이벤트를 위해 천문학적인 돈을 쏟아붓고 산을 깎아내고 나무를 베어내야 하는가? 더 이상은 안 된다는 경고의 종소리가 세계 곳곳에서 울리기 시작한다.

맹수진 영화평론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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