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 음식, 사실 3일 지나도 괜찮습니다”
정부가 2023년부터 ‘유통기한’ 표시를 단계적으로 폐지하고 ‘소비기한 표시제’를 전면 도입하면서 마트 진열대와 식품 포장지에서 ‘유통기한’이 사라지고 있다.
가공식품은 소비기한 이내라면 영양 성분 변화가 거의 없다. 다만 개봉 후 보관이 미흡한 경우에는 기한보다 빨리 품질이 떨어질 수 있다. 게티이미지 ‘판매 가능 시점’을 기준으로 했던 유통기한과 달리 소비기한은 ‘섭취 가능 시점’을 기준으로 한다. 다시 말해 “언제까지 팔 수 있는가”가 아닌 “언제까지 먹어도 안전한가”를 따지는 제도다.
◆“유통기한보다 최대 50% 더 길다”
15일 식품의약품안전처에 따르면 소비기한은 안전에 문제가 생기지 않는 범위에서 품질이 유지되는 기간이다. 유통기한보다 평균 30~50% 더 길다.
냉장고 속 ‘하루 지난 음식’이 반드시 버려야 할 음식이 아니라는 뜻이다.
최근 식약처는 지난 3년간 179개 식품 유형, 1450개 품목을 대상으로 실험을 진행했다.
실험실, 저장고, 유통 환경을 재현해 미생물 증식, 산패(酸敗), 관능 평가 등 품질 변화를 종합 분석해 과학적으로 검증된 ‘식품 수명’을 산출했다.
그 결과 과자는 소비기한 참고값이 122~496일, 초콜릿은 121~294일이었다. 김치는 31~106일, 두부는 33~38일로 나타났다.
◆가장 오래가는 식품은? 기름·간장류
기름류는 가장 안정적인 품목으로 꼽혔다. 참기름·들기름·해바라기유·콩기름은 최대 32개월까지 안전성이 확인됐다.
밀폐 용기에 담아 빛을 차단하면 산패가 늦어지는 경향이 뚜렷했다.
간장류도 마찬가지다. 한식 간장·양조간장·혼합간장의 소비기한은 약 2년 7개월(16개월~996일)로 확인됐다. 염분이 높고 pH가 낮아 세균이 번식하기 어렵기 때문이다.
반면 냉장 보관이 필수인 두부의 소비기한은 22~28일, 생육은 약 48일, 가열·가공된 햄·소시지는 50~90일 수준이었다.
마요네즈, 케첩 등 조미식품은 평균 11개월, 냉동 만두나 간편조리세트는 영하 18도 이하에서 약 500일 동안 안전하게 보관 가능했다.
◆냉동식품의 함정…“재냉동, 절대 금지”
냉동식품은 미생물 활동이 사실상 멈추지만, 한 번 녹였다가 다시 얼리는 ‘재냉동’은 금물이다. 해동 과정에서 생긴 수분이 세균 번식의 온상이 되기 때문이다.
전문가들은 “냉동식품은 해동 후 즉시 조리해야 안전하다”고 강조한다.
한 식품공학 전문가는 “과거 유통기한은 제조사 입장에서 ‘판매 가능한 시점’이었지만, 소비기한은 ‘섭취 가능한 시점’을 기준으로 한다”며 “소비자 중심의 제도로 한 단계 진화한 셈”이라고 말했다.
이어 “소비기한은 단순히 날짜를 늘린 것이 아닌 미생물 증식과 품질 변화를 과학적으로 분석한 결과”라며 “안전하게 먹을 수 있는 기간을 실험으로 입증한 제도”라고 덧붙였다.
◆“음식물 쓰레기, 30% 줄일 수 있다”
유통기한이 지나면 무조건 버리던 관행이 바뀌면, 식품 폐기량을 크게 줄일 수 있다. 해외에서도 소비기한 도입 이후 음식물 쓰레기가 20~30% 감소했다.
이번 제도는 제조사보다 소비자를 중심에 둔 ‘정보 개방형 표시제’다. 소비자가 더 합리적인 선택을 할 수 있는 길이 열린 셈이다.
소비기한은 ‘보관이 잘된 상태’를 전제로 한 기준이다. 따라서 냄새, 색, 포장 상태를 함께 확인하는 ‘이중 안전 습관’이 필요하다.
한 소비자교육 전문가는 “냉장고 관리 습관이 바뀌지 않으면 제도 효과도 미미할 것으로 보인다”며 남“은 음식을 먼저 소비하는 ‘선(先)소비 순환 습관’이 자리 잡아야 한다”고 강조했다.
‘기한이 지났으니 버려야 한다’는 습관에서 벗어나 보관 상태를 확인하고, 과학적 근거로 판단하는 소비가 이제는 새로운 상식이 되고 있다. 게티이미지 유통기한과 소비기한의 차이를 이해하면 음식물 쓰레기를 줄이는 데 큰 도움이 된더. 매년 버려지는 식품의 절반 가까이가 ‘기한 오인’ 때문이라는 점을 고려하면, 제도 효과는 상당할 것으로 보인다.
식품을 과학적으로 오래 활용할 수 있다는 인식은 환경·경제적 지속가능성을 높이는 핵심이다. ‘안전하게 오래 먹기’가 곧 탄소 절감으로 이어질 수 있다.
◆“소비기한 이내, 영양 손실 거의 없어”
가공식품은 소비기한 이내라면 영양 성분 변화가 거의 없다.
다만 개봉 후 보관이 미흡한 경우에는 기한보다 빨리 품질이 떨어질 수 있다.
영양업계 한 관계자는 “냉동식품은 소비기한이 길다고 방심하면 안 된다”며 “해동과 재냉동 과정에서 세균이 번식하기 쉬워 ‘한 번 녹으면 바로 조리’가 원칙”이라고 설명했다.
◆“날짜 대신, 과학을 믿는 식탁으로”
소비기한 제도는 단순한 날짜 표기 변경이 아니다.
식품의 과학적 수명을 정확히 측정해 낭비를 줄이고, 소비자에게 더 많은 선택권을 주는 변화다.
‘기한이 지났으니 버려야 한다’는 습관에서 벗어나 보관 상태를 확인하고, 과학적 근거로 판단하는 소비가 이제는 새로운 상식이 되고 있다.
김현주 기자 hjk@segye.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