청산수목원 핑크뮬리·팜파스그라스. 사각사각. 바람이 스칠 때마다 속삭인다. 마치 막 사랑에 빠진 연인들 수줍은 언어처럼. 투명한 햇살 받아 은백색으로 반짝이는 눈부신 팜파스그라스. 그 앞에서 바다의 숨결처럼 출렁이는 핑크뮬리 물결. 그런 동화 같은 풍경 품으며 가시거리를 무한대로 펼친 높고 푸른 하늘까지. 충남 태안의 보석, 청산수목원을 느리게 걷다 팍팍한 사내 가슴마저 서정으로 물들이는 만추의 수채화를 만났다.
세계일보 여행면.
세계일보 여행면. ◆팜파스·핑크뮬리 모두 즐겨 볼까 어느덧 11월. 시간이 빠르게 달려 가을 속으로 깊숙하게 들어서자 색은 더 깊고 강렬한 악센트를 품는다. 기온이 갑자기 떨어지고 비도 많이 온 덕분인가. 올해 가을은 단풍이 유난히 곱다. 단풍만큼 가을 정취를 물씬 풍기는 것은 억새와 ‘연인들의 성지’ 핑크뮬리. 충남 태안군 청산수목원을 찾으면 서양 억새 팜파스그라스와 핑크뮬리가 어우러지는 환상적인 풍경을 만난다.
청산수목원 홍련원 포토존. 매표소를 지나자마자 탄성이 터진다. 길게 이어지는 황금삼나무 터널 때문이다. 한낮에도 햇살을 가릴 정도로 울창해 신비로움을 더하는 이곳은 드라마 ‘사랑의 불시착’에서 현빈과 손예진이 자전거를 타고 달리던 길. 연인들은 발걸음을 멈추고 드라마 주인공처럼 예쁜 사진을 찍느라 바쁘다. 길을 따라 왼쪽으로 홍련원이 펼쳐진다. 여름에 연꽃이 화려한 자태를 뽐내는 연못에는 자라풀, 부레옥잠, 개구리밥, 물수세미, 생이가래 등 다양한 수생식물이 어우러져 자라며 싱그러운 자연의 향기를 선사한다. 청산수목원 주소가 남면 연꽃길로 홍련원 덕분에 이런 주소를 얻었다. 연못을 배경으로 둔 보랏빛 의자 포토존이 인기. 오랜만에 함께 여행에 나선 50대 여고 동창생들은 손 하트를 만들고 깔깔대며 가을 낭만을 추억으로 남긴다.
청산수목원 핑크뮬리와 팜파스그라스.
청산수목원 핑크뮬리 산책로. 홍련원을 뒤로하고 작은 시냇물을 건너면 청산수목원에서 가장 예쁜 공간을 만난다. 핑크뮬리가 바다처럼 펼쳐지는데, 서로를 마주 보는 연인들의 불그스레한 뺨을 닮았다. 그 뒤를 2~3m 높이의 거대한 팜파스그라스가 병풍처럼 둘러서 가을 낭만을 더한다. 그대로 떼어내 노트북 배경화면으로 깔고 매일 들여다보고 싶은 풍경이다. 카페에서 그윽한 향기 가득한 커피 한잔 받아들고 정원이 잘 보이는 야외 테이블에 앉는다. 아직 따뜻한 한낮의 태양 즐기며 예쁜 풍경 눈에 가득 담으니 메마른 가슴이 만추의 서정으로 촉촉하게 젖는다.
청산수목원 책 조형물 포토존. 모네의 연원을 지나 동물농장으로 가는 홍가시나무 오솔길에서는 커다란 책 조형물을 쌓아 놓은 포토존을 만난다. 맨 위에 올라가 앉으면 홍가시나무와 어우러지는 근사한 사진을 얻을 수 있다. 동물농장은 아이들이 독차지했다. 동글동글 귀여운 외모의 알파카 덕분이다. 잎사귀를 내밀자 목을 길게 빼고 서로 먹으려고 치열하게 다투는 모습에 알파카보다 더 귀여운 꼬마 아이는 웃음꽃을 터뜨린다.
청산수목원 밀레정원. 밀레의 대표작 ‘만종’ ‘이삭 줍는 여인들’ 조형물로 꾸민 밀레정원, 홍가시카페, 그리스 정원, 고갱 가든을 지나면 드디어 청산수목원의 하이라이트, 팜파스원이 모습을 드러낸다. 어른 키 두 배 높이의 팜파스그라스가 빽빽한 숲을 이룬 풍경이 낭만적이다. 청산수목원은 ‘팜파스 성지’로 우리나라에서 가장 많은 팜파스그라스가 자라는데 1000주가 넘는다. 수목원 신형철 원장이 2010년부터 전국의 팜파스그라스를 모두 찾아내 이곳에 심기 시작했는데 15년 세월 동안 무럭무럭 자라면서 거대한 자연 군락지처럼 변했다. 팜파스그라스는 관리하기 매우 까다롭다. 태풍에 약하고 기온이 영하 6도 밑으로 떨어지면 얼어 죽는다. 이에 겨울마다 몸통을 일일이 볏짚 등으로 싸매 보온을 잘 유지해야 한다. 그런 식물을 이 정도로 키워냈다니 대단한 열정이다. 청산수목원 핑크뮬리축제와 팜파스그라스축제는 11월 말까지 이어진다.
청산수목원 동물농장 알파카.
청산수목원 팜파스원. 청산수목원은 약 10만㎡ 규모이며 ‘봄에 피는 단풍’ 홍가시나무가 수목원을 붉게 물들이는 4~6월 웨딩화보 촬영 장소로 큰 인기를 누린다. 특히 삼족오 미로공원은 향나무와 화살나무로 둘레를 성벽처럼 두르고, 그 안에 가이스카향나무, 홍가시나무, 황금측백나무로 미로를 만들어 놓아 어디서도 볼 수 없는 독특한 풍경을 선사한다. 또 5~6월에는 꽃창포 세상으로 변신하고 7~8월에도 태안연꽃축제가 이어져 사계절 예쁜 풍경을 즐길 수 있다. 크게 수목원과 수생식물원으로 이뤄졌고 수목과 야생화 600여종이 자란다. ◆태안 노을길 걷고 꽃게탕도 먹고
백사장항 꽃게랑새우다리. 서해를 품은 태안은 굽이굽이 이어지는 리아스식 해안을 따라 펼쳐지는 바다와 숲에서 힐링하는 태안 해변길이 마련돼 있다. 북쪽 학암포에서 남쪽 영목항까지 100㎞에 달하며 바라길, 소원길, 파도길, 솔모랫길, 천사길, 노을길, 샛별길, 바람길 등 모두 7개 코스다. 이 중 5코스 노을길이 가장 인기가 높다. 이름처럼 ‘노을 맛집’들이 널려 있기 때문이다. 백사장항~기지포해변~두여전망대~꽃지해변으로 이어지는 노을길은 12㎞로 대부분 평지여서 아름다운 바다를 즐기며 편안하게 걸을 수 있다는 점이 매력이다.
드르니항. 각종 수산물 판매장과 어촌문화가 살아 숨 쉬는 백사장항에서 여행을 시작한다. 항구로 들어서자 바다 맞은편 드르니항을 잇는 길이 250m 꽃게랑새우다리가 ‘맛있는’ 자태로 유혹한다. 바다를 가로 지르는 다리의 주탑 2개는 영락없는 꽃게의 집게발 모양이다. 나선형 경사로를 빙빙 돌아 다리 위로 올라서자 백사장항, 드르니항, 드넓은 갯벌, 점점이 떠 있는 작은 섬이 어우러지는 풍경이 파노라마로 펼쳐진다. 보행전용 다리로 해 질 무렵 다리 위에서 서면 붉은 태양이 바다 위로 떨어지는 환상적인 풍경을 만난다.
백사장항 어촌계 수산시장 꽃게. 백사장항 쪽 입구에는 새우, 드르니항쪽 입구에는 꽃게 조형물을 세워 놓았는데 해당 지역에서 꽃게와 새우가 많이 잡힌다는 상징 의미를 담았다. 딴뚝통나무집, 생생왕꽃게, 털보선장횟집 등 태안 곳곳에 맛집이 널려 있어 갓 잡아 올린 싱싱한 꽃게, 대하로 만든 다양한 미식을 맛볼 수 있다.
꽃게탕.
생선구이. 해산물을 좋아한다면 백사장항 어촌계 수산시장은 꼭 들러야 한다. 우리나라 최대 자연산 대하 집산지이며 품질이 뛰어난 대하 등을 착한 가격으로 구입할 수 있다. 수산시장은 손님을 서로 모시려는 상인과 가격을 흥정하는 손님의 왁자지껄한 목소리로 활기가 넘친다. 커다란 수조에는 싱싱한 횟감용 자연산 대하와 꽃게가 즐비해 식욕을 자극한다. 또 암꽃게인 갱개미를 비롯해 서대, 장대, 홍어, 가자미, 갈치, 열기, 홍우럭 등 반건조 수산물도 다양해 구경하는 재미가 쏠쏠하다. 백사장항은 옥석같이 고운 흰 모래밭을 품어 이런 이름을 얻었다.
꽃지해변 할미할아비바위. 사람 냄새 물씬 나는 백사장항을 뒤로하고 남쪽으로 걸으면 세 개의 봉우리가 인상적인 삼봉해변에 닿는다. 웅장하면서 호젓한 자태의 해송이 빽빽하게 들어찬 곰솔림을 걸을 수 있다. 아름답게 복원돼 해안 동식물의 보고가 된 기지포 해안사구, 천연기념물 방포 모감주나무 군락지를 지나면 꽃지해변의 할미·할아비 바위가 슬픈 전설만큼 바다에 아련하게 떠 있다. 통일신라시대 안면도 기지 사령관 승언이 전쟁을 치르러 나갔지만 돌아오지 않았고, 아내 미도는 남편을 애타게 기다리다 숨져 할미바위가 됐다. 얼마 뒤 그 옆에 승언의 바위가 솟아나 할아비바위가 됐단다.
안면도자연휴양림. 안면도자연휴양림은 꽃지해변에서 차로 5분 거리여서 함께 둘러보기 좋다. 국내 유일의 소나무 단순림으로 430㏊ 규모에 수령 100년 안팎의 소나무(안면송)가 울창하게 자란다. 휴양림으로 들어서자 하늘을 향해 거침없이 뻗어 올라간 소나무들이 뿜어내는 솔향기가 비강으로 마구 파고들며 일상에 찌든 번잡한 머리를 금세 맑게 씻어낸다. 6~8m 높이의 스카이워크 데크길이 283m가량 이어져 공중에서 피톤치드 샤워를 즐길 수 있다. 안면송은 고려 때부터 궁궐과 배를 만드는 데 주로 사용했으며 도벌과 남벌이 심해지자 왕실에서 특별 관리한 것으로 전해진다.
영목항전망대 드론 촬영. 태안 해변길 7코스 대미를 장식하는 영목항 인근에는 태안의 새 랜드마크가 된 높이 51.26m 영목항 전망대가 우뚝 서 있다. 전체를 통유리로 꾸민 22층 전망대에 오르자 영목항, 장고도, 고대도, 태안과 보령을 잇는 원산안면대교, 서해바다, 거대한 갯벌이 펼쳐지는 풍경이 가슴을 시원하게 열어준다. 전망대에서 보는 서해안 낙조도 빼어나고, 어두워지면 전망대에 불이 들어와 주변을 산책하며 야경을 즐기기 좋다. 태안=글·사진 최현태 선임기자 htchoi@segye.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