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김동기의시대정신] 페이커의 시대, 두 거인이 떠올랐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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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동기의시대정신] 페이커의 시대, 두 거인이 떠올랐다
김구가 꿈꾸었던 ‘문화의 힘’과 이건희가 내다본 ‘디지털의 힘’ 시대를 앞선 통찰 나란히 보니 오늘날 ‘K컬처의 결실’ 뭉클해
“게임이 한창 진행 중인 컴퓨터의 전원을 순간적으로 모두 꺼 보았습니다. ” 2011년 보도된 이 뉴스는 지금도 ‘레전드’ 영상으로 회자된다. 전원 차단 직후 이용자들의 분노와 욕설을 ‘게임 폭력성’의 증거로 제시했지만, 허술한 실험 설계와 무리한 결론은 두고두고 조롱거리가 되었다. “수능생의 폭력성을 알아보기 위해 시험 종료 1분 전 OMR 카드를 모두 찢어보았습니다”와 같은 밈으로 풍자되기도 한다.

게임은 오랫동안 ‘문화’가 아닌 ‘문제’였다. 1990년대 청년 PD였던 나는 ‘생방송 게임천국’이라는, ‘그 시절 나름의 e스포츠’ 프로그램을 만들었다. 당시만 해도 ‘농땡이들이나 하는 게임’을 공중파에 끌어오는 일은 쉽지 않았다. 윗사람 눈치에 시청자 눈치까지 챙겨야 했다. 고민 끝에 한 사람을 찾아갔다. 의사이자 보안기업 ‘안랩’의 설립자인 안철수 대표다. 그의 인터뷰가 편견의 문턱을 넘는 힘이 되었다.
김동기 국가미래연구원 연구위원 전 KBS PD 최근 젠슨 황 엔비디아 최고경영자(CEO)의 ‘샤라웃(shout-out·공개적인 응원)’은 격세지감을 느끼게 한다. 이재용, 정의선 회장과의 치킨 회동을 마친 젠슨 황이 주먹을 불끈 쥐고 “페이커! 페이커!”를 외쳤던 그 장면이다. 페이커의 본명은 이상혁. 온라인 게임 ‘리그 오브 레전드’의 최정상 플레이어다. 지난 9일, 그가 이끄는 T1 팀이 중국 청두에서 열린 ‘롤드컵(LoL 월드 챔피언십)’을 제패하며 3년 연속 우승이라는 대기록을 썼다. 대한민국은 지금 ‘페이커 앓이’ 중이다.

스타크래프트 시절 임요환의 1억원 연봉이 화제였던 때를 떠올리면, 오늘날 e스포츠의 위상은 놀라울 따름이다. 현재 페이커의 연봉은 70억원 이상으로 알려져 있다. 중국의 260억원대 영입 제안을 거절했다는 일화도 따라다닌다. 미국 ESPN은 그를 봉준호, BTS, 손흥민과 함께 ‘한국의 엘리트 4’로 꼽았고, 중국의 한 언론은 김연아를 더해 ‘한국의 5대 국보’라 소개했다. 농구의 조던, 축구의 메시에 견주어질 정도다.

게임은 현재 기술과 산업, 문화를 연결하며 역동적으로 성장하고 있다. 탄탄한 게임 서사는 영화, 드라마 등 타 장르로 활발히 변주 중이다. 게임을 즐기지 않더라도 게임음악만큼은 주의 깊게 들어보길 권한다. 영화음악의 거장 한스 치머와 구스타보 산타올라야도 참여했다. 그들이 작곡한 ‘콜 오브 듀티’와 ‘더 라스트 오브 어스’의 테마는 그 장엄함과 쓸쓸함이 압권이다. ‘파이널 판타지’, ‘젤다의 전설’ OST는 전 세계 오케스트라에 의해 독립적으로 연주되고 있다. 개인적으로 롤드컵을 기다리는 이유도 음악에 있다. 이매진 드래곤스, 릴 나스 엑스 등 정상급 아티스트들이 매년 수준 높은 주제곡을 공개한다. 페이커가 최종 보스로 등장하는 뮤직비디오를 볼 때마다 자부심이 차오르는 건 어쩔 수 없다.

그동안 K컬처는 마치 장르별 도장 깨기를 하는 듯했다. 2020년 영화 ‘기생충’의 오스카 석권, 2022년 드라마 ‘오징어 게임’의 에미상, 2024년 한강 작가의 노벨문학상, 2025년 뮤지컬 ‘어쩌면 해피엔딩’의 토니 어워즈 6관왕에 이어 애니메이션 ‘케데헌’까지 세계적 신드롬을 일으켰다. 게임 세계의 권좌에는 물론 페이커가 있다. 최근 대중음악 장르에도 반가운 소식이 있었다. K팝의 글로벌 인기에도 불구하고 그래미 본상(제너럴 필즈)만큼은 늘 굳게 닫혀 있었다. 그런데 지난 7일 발표된 2026년 그래미 어워즈 후보에 케데헌의 ‘골든’, 블랙핑크 로제의 ‘아파트’가 올해의 노래, 올해의 레코드에 오르며 마침내 그 벽을 깬 것이다.

이런 소식이 들릴 때마다 어김없이 달리는 댓글이 있다. “김구 선생님, 보고 계십니까.” 백범 김구 선생의 ‘나의 소원’에서 비롯된 밈이다. “우리의 부력(富力)은 우리의 생활을 풍족히 할 만하고, 우리의 강력(强力)은 남의 침략을 막을 만하면 족하다. 오직 한없이 가지고 싶은 것은 높은 문화의 힘이다. ” 가난과 질곡의 한복판에서 어떻게 그런 담대한 시선이 가능했을까. 유네스코가 2026년을 ‘백범 탄생 150주년 기념해’로 공식 지정한 것은, 그의 이상이 오늘날 인류의 보편적 가치에 맞닿아 있기 때문이다.

우리는 얼마 전 또 하나의 ‘소원’을 알게 되었다. “페이커”를 외치던 그 자리에서 젠슨 황이 꺼내놓은 일화다. 1996년 그는 고(故) 이건희 삼성 선대 회장으로부터 편지 한 통을 받았다고 했다. 편지에는 이렇게 적혀 있었다. “내게 세 가지 비전이 있습니다. 첫째, 누구도 소외되지 않도록 대한민국 전역을 초고속 인터넷으로 연결하고 싶습니다. 둘째, 비디오 게임이 한국에 기술 혁신을 가져올 것이라 믿습니다. 셋째, 세계 최초로 비디오 게임 올림픽을 열고 싶습니다. ” 젠슨 황은 덧붙였다. “그 편지에 담긴 비전은 모두 현실이 되었습니다. ”

김구 선생이 꿈꿨던 ‘문화의 힘’과 이건희 회장이 내다본 ‘디지털의 힘’. 시대를 앞선 두 거인의 통찰을 나란히 놓고 보니, 긴 시간을 달려 오늘에 이른 결실이 뭉클해진다. 한 사람 한 사람 놀라운 개인의 성취지만, 그들의 발밑에는 언제나 더 큰 어깨가 버티고 있었다. 좌표가 흔들리면 공동체는 길을 잃는다. 다음 시대의 좌표는 지금 어디쯤일까. 다시, 거인이 필요하다.

김동기 국가미래연구원 연구위원 전 KBS PD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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