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기역은 가시 히읗은 황토』 김용만 “밤마다 내려오는 별은 또 어쩌라고 당호를 짓겠는가” [김용출의 한권의책]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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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기역은 가시 히읗은 황토』 김용만 “밤마다 내려오는 별은 또 어쩌라고 당호를 짓겠는가” [김용출의 한권의책]
“밭두둑 만들어/ 강낭콩 심었더니/ 강낭콩 나고/ 서리태 심었더니/ 서리태 나고/ 안 심은 자리 안 나고/ 풀이 나더라// 원래 밭주인은 풀이었더라”(「묵정밭 1」 전문)

부산에서 공장 용접공으로 30여 년 일한 뒤 전북 완주 산골에 터 잡은 김용만 시인이 날마다 뒤란 텃밭을 일구며 걷어 올린 시 91편을 묶은 두 번째 시집 『기역은 가시 히읗은 황토』(창비)를 발표했다. 4년 만에 선보인 신작 시집. 1987년 ‘실천문학’을 통해 작품 활동을 시작한 시인은 등단 34년 만에 첫 시집 『새들은 날기 위해 울음마저 버린다』를 펴내 화제가 되기도 했다.

시인은 이번 시집에서 대지의 언어와 정겨운 토속어로 자연과 더불어 살아가는 삶의 이모저모를 진솔하게 기록한 산중 일기를 들려준다. 언젠가 뒤란에 있던 텃밭에 새롭게 달배미 밭도 만든 모양이다.

“뒤안 빈터/ 달배미 밭 하나 더 만들었다/ 마당 꽃밭에 흙 들일 겸// 젖은 돌들이/ 호미 끝을 거부한다/ 끝은 늘 부딪친다/ 끝부터 닳는다/ 닳은 부분이 끝이 되어/ 다시 돌 끝에 닿는다/ 수도 없이 올라오는 돌멩이들/ 큰 돌 하나 빠지면/ 돌 크기만큼 밭이 된다/ 허리를 숙여야/ 호미 끝이 땅에 닿는 법/ 끝이 되기 위해 끝을 벼리는 호미// 세상은 늘 끝이 썼다”(「끝」 전문)

자연과 인간을 살피고 돌보는 ‘대지의 청지기’로서 “한 사람의 혁명”(고영직, 해설)을 추구하는 시인에게, 자연 만물은 단순한 소재가 아니라 생명을 가진 존재가 된다. 그들과 소통하며 공존을 조용하게 모색한다.

“시골집 하나 사 고쳤더니/ 집에 온 사람마다/ 당호를 지어 걸라 한다/ 그래도 저래도 좋지만 난 싫다/ 무슨 특별한 집처럼 사람처럼/ 표 내는 것 싫다/ 사시사철 찾아드는/ 벌 나비 집이고/ 바람과 햇살 오가는/ 두꺼비 집이고/ 돌담에 숨어 사는 다람쥐도 주인인데/ 힘센 짐승이라고/ 지 맘대로 내걸면 폭력 아닌가/ 집 찾아드는 오만 것들/ 자기 집이라 하면 안 되는가// 밤마다 내려오는 별은 어쩌고”(「밤마다 내려오는 별은 어쩌고」 전문)

시인의 시에는 몸으로 살아낸 노동의 시간과 땀 냄새가 짙게 배어 있다. 아마 ‘마찌꼬바’(작은 공장을 뜻하는 일본어) 용접사로 살았던 과거의 시간과 산중에서 땅을 일구고 시를 쓰는 현재의 시간이 겹쳐졌기 때문일 것이다.

“뒤란 밭 풀 줍다/ 비 맞는다/ 농부는 등이 먼저 젖는다// 등이 먼저 뜨겁고/ 등이 먼저 무겁고/ 등이 먼저 아프다// 엎드린 농부는 등이 역사다/ 흘러내린 땀 가슴으로 안는다/ 흘린 땀 끌어안고 등이 굽는다”(「농부는 등이 역사다」 전문)

김용만의 시는 어렵지 않다. 흙냄새가 나고 땀 냄새가 난다. 현학적인 수사 대신 직관적인 대지와 생의 언어로 삶의 본질과 비루함, 숭고함을 포착한다. 그리하여 각박한 세상에 사는 현대인들에게 깊은 평화와 위로를 주는 데 성공한 듯하다. 아마 그 배경에는 아내를, 사람을 배려하는 마음이 자리하고 있기 때문 아닐까.

“퇴직하고 산골 내려와/ 아내 곤히 잠든 밤/ 홀로 깨어 서늘히 시집 읽는다/ 밤새 눈 내려 쌓이고/ 언제 그랬냐는 듯/ 하늘에 별들 깊다/ 문밖을 나서려다/ 눈 귀한 데 살다 온/ 아내 위해 차마/ 마당에 내려서지 못했다”(「차마」 전문)

김용출 선임기자 kimgija@segye.com, 사진=세계일보 자료사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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