길 위에서1 [詩의 뜨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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남진우
길 가던 고슴도치가
밤송이를 만나서 말했다
이봐 그딴 가시 좀 치워주지 그래
길 가는 데 방해가 되는구먼
밤송이는 말이 없고
그 옆에서 밤껍질을 갉작이고 있던
다람쥐가 말했다
너도 그 곤두세운 가시 좀 치워보지 그래
그 속에 무엇이 들었는지 확인해보게
고슴도치가 지나가고
다람쥐도 사라지고
길 위엔 알맹이 없는 밤송이만 남았다
지나가는 바람에 밤송이가
중얼거리는 말이 새어 나왔다
내가 스스로 익어 벌어지기 전까진
내 몸에 손가락 하나 까딱하지 못한 것들이

-시집 ‘숲 속의 대성당’(문학과지성사) 수록

●남진우
△1960년 전주 출생. 1981년 동아일보 신춘문예를 통해 작품 활동. 시집 ‘깊은 곳에 그물을 드리우라’, ‘죽은 자를 위한 기도’, ‘타오르는 책’, ‘새벽 세 시의 사자 한 마리’ 등 발표. 김달진문학상, 현대문학상, 대산문학상, 김종삼시문학상 등 수상.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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