더블린 시내 한 공원 이름 놓고 아일랜드·이스라엘 ‘긴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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더블린 시내 한 공원 이름 놓고 아일랜드·이스라엘 ‘긴장’
시의회에서 ‘헤르초그 공원’ 개명 안건 논의 이스라엘 대통령실 “양국 관계에 해 끼칠 것”
아일랜드 섬에서 랍비(유대교 율법학자)의 아들로 태어난 유대인이 있다. 사실상 아일랜드인으로 성장한 그는 1948년 신생 독립국 이스라엘의 군대에 투신했다. 외교관으로 대성한 뒤로는 이스라엘 국가원수에까지 올랐다. 1983∼1993년 이스라엘 제6대 대통령을 지낸 하임 헤르초그(1918∼1997)가 바로 주인공이다.
아일랜드 수도 더블린 남부에 있는 헤르초그 공원의 표지석. 아일랜드 태생으로 1983∼1993년 이스라엘 대통령을 지낸 하임 헤르초그를 기념하고자 1995년 조성됐다. BBC 홈페이지 캡처 11월 30일(현지시간) BBC 방송에 따르면 아일랜드 수도 더블린에 있는 헤르초그 공원의 명칭을 변경하는 안건을 놓고 아일랜드와 이스라엘 사이에 외교적 마찰이 빚어질 조짐이다. 두 나라는 이스라엘과 팔레스타인 무장 정파 하마스 간의 전쟁을 둘러싼 견해차로 인해서 이미 관계가 극도로 악화한 상태다. 아일랜드는 서유럽 국가들 중에서도 이스라엘을 비판하고 팔레스타인에 동조하는 목소리가 가장 큰 나라다.

헤르초그 공원은 지금으로부터 꼭 30년 전인 1995년 더블린 남부에 조성됐다. 아일랜드 태생으로 더블린에서 오랜 시간을 보낸 뒤 이스라엘 대통령까지 역임한 헤르초그를 기념하는 것이 목적이다. 그런데 2022년 10월 이스라엘과 하마스 간에 전쟁이 벌어지며 더블린 시민들 사이에 “헤르초그 공원이란 이름은 부적절하다”는 주장이 터져나오기 시작했다. 이스라엘의 무차별 공격으로 하마스의 근거지인 가자 지구에서 어린이와 여성을 비롯한 민간인 희생자가 속출하자 반(反)이스라엘 여론은 더욱 확산했다.

마침내 더블린 시의회가 헤르초그 공원 개명 안건을 정식으로 회의에 상정하는 지경에 이르렀다. 이는 노동당 등 진보 성향 시의원들이 주도한 데 따른 것이다. 시의회는 조만간 표결을 통해 개명 여부를 확정할 것으로 알려졌다.
이스라엘 제6대 대통령을 지낸 하임 헤르초그(왼쪽)와 그의 아들인 이츠하크 헤르초그 현 이스라엘 대통령. 세계일보 자료사진 그러자 아일랜드 중앙 정부가 난색을 표하고 나섰다. 가자 지구 전쟁을 거치며 가뜩이나 악화한 이스라엘과의 관계가 완전히 파탄이 나지 않을까 염려한 탓이다. 미할 마틴 아일랜드 총리는 아일랜드의 유대인 공동체가 과거 영국으로부터의 독립 전쟁은 물론 신생 공화국 아일랜드의 국정 운영에 참여하는 등 지난 수십년간 아일랜드 발전에 기여한 점을 강조했다. 그러면서 “헤르초그 공원 이름을 지우자는 제안은 우리 역사를 부정하는 것”이라며 “이스라엘은 물론 국제사회로부터 ‘반유대주의 조치’란 지적을 받을 가능성이 크다”고 말했다.

대표적 친(親)이스라엘 국가인 미국은 물론 이스라엘 정부도 부정적 목소리를 냈다. 마침 이츠하크 헤르초그 현 이스라엘 대통령은 하임 헤르초그의 아들이다. 이스라엘 대통령실은 사회관계망서비스(SNS)를 통해 “공원에서 헤르초그의 이름을 삭제하는 것은 수치스럽고 불명예스러운 일”이라며 “아일랜드 민족과 유대 민족 간의 오랜 유대 관계에 해악을 끼칠 것”이라고 경고했다.

김태훈 논설위원 af103@segye.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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