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1세기 국제질서를 설명하는 언어는 분명히 바뀌고 있다. 한때 세계 질서를 규정하던 핵심 변수는 국가의 지리적 위치가 힘의 균형을 좌우했던 지정학이었다. 그러나 이러한 전통적 변수들은 더 이상 국제질서의 핵심을 설명하지 못한다. 오늘날에는 AI·반도체·양자 기술과 같은 전략기술이 국가의 산업 경쟁력, 안보, 동맹을 좌우한다. 우리는 이러한 새로운 질서 전환을 '기정학(Techno-politics)'이라 부른다.
이러한 변화는 단순한 산업 환경의 변화가 아니다. 기술은 안보를 규정하고, 외교의 선택지를 제한하며, 국가 간 신뢰와 배제의 경계를 만들어내는 정치적 힘으로 작동한다. 기술 표준은 외교적 입장을 반영하고, 공급망은 안보 지도를 다시 그린다. 인재 이동과 연구 협력조차 정치적 환경의 영향을 받는다. 오늘날 국제질서에서 기술은 중립적 도구가 아니라, 국가가 어느 질서에 속해 있는지를 드러내는 신호가 되고 있다.
2026년의 세계는 선택지가 구조적으로 제한되어 있다. 그 핵심 구조는 미·중 간 패권 경쟁이다. 이는 단기적 우위 다툼이 아니라 체제의 지속 가능성을 겨루는 장기전이다. 미국은 동맹과 규칙, 표준을 중심으로 네트워크형 질서를 강화하고, 중국은 기술 자립과 내수 중심의 안정성을 통해 외부 충격을 흡수하는 구조를 구축하고 있다.
이 과정에서 기술은 완전히 정치화되었다. 기술 선택은 곧 정치적 선택이 되고, 기술 협력은 외교적 입장의 연장이 된다. 2026년의 국제질서는 기술을 둘러싼 선택이 국가의 정체성과 전략적 위치를 동시에 규정하는 구조로 굳어지고 있다.
이러한 질서는 대한민국과 같은 중견국에 특히 가혹하다. 안보는 미국에 의존하고, 경제는 중국과 깊이 얽혀 있으며, 기술 경쟁의 최전선에는 우리의 주력 산업이 자리하고 있다. 그 어느 하나도 포기할 수 없는 조건 속에서 '균형 외교'는 더 이상 실질적 해법이 되기 어렵다. 이러한 상황에서 모든 영역에 동일한 논리를 적용하려는 시도는 오히려 비용을 증폭시킬 수 있다.
현실적인 대응은 영역별로 다른 논리를 적용하는 기능적 분화다. 안보는 동맹 중심으로 관리하고, 기술은 선택과 집중을 통해 위험을 통제하며, 시장은 다변화를 통해 충격을 흡수하고, 규범은 유연한 참여로 공간을 확보해야 한다. 이는 주어진 구조 속에서 생존 비용을 최소화하기 위한 전략적 선택이다.
글로벌 질서 역시 단순한 다극화가 아니라 다층화되고 있다. 안보는 양극화되고, 기술은 블록화되며, 경제는 부분적으로만 연결된다. 규범은 분야별로 분절되고, 협력은 선택적으로 이루어진다. 이러한 질서에서 외교의 핵심은 선언이나 가치가 아니라 충돌하는 요구를 관리하는 능력으로 이동한다.
이러한 맥락에서 2026년은 '전략의 시대'가 끝났음을 상징하는 해다. 거대한 비전이나 구호를 선언한다고 해서 국제질서가 바뀌지 않는다. 대신 이미 주어진 조건을 얼마나 정교하게 운영하느냐가 국가의 운명을 좌우한다. 정책의 방향성보다 더 중요한 것은 실행의 정밀도와 사회가 감내할 수 있는 비용을 관리하는 역량이다.
2026년 국제질서의 메시지는 명확하다. 미래는 불확실해서 어려운 것이 아니라, 이미 상당 부분 확정되어 있어서 더 어렵다. 이제 국가에 요구되는 능력은 예측이 아니라 관리다. 누가 더 정확하게 내다보느냐보다, 누가 주어진 파도에 더 안정적으로 올라타느냐가 2026년의 성패를 가를 것이다.
서용석 KAIST 문술미래전략대학원 교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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