평온한 거리·차분한 사람들… ‘범생 사회’ 대만 체류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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평온한 거리·차분한 사람들… ‘범생 사회’ 대만 체류기
범생 공화국, 대만/ 안문석/ 인물과사상사/ 1만9000원

“거리도 평온하고, 시장도 가만가만 움직인다. 드잡이가 없다. 교통사고가 나도 소리 지르는 사람은 없다. 시위도 거의 없다. 어디서나 모범생을 지향하고, 칭찬했다. 그 범생들이 경제와 정치, 사회 각 부문을 이끌고 있다. 그 힘으로 조용하면서도 쉼 없이 앞으로 간다. ”

전북대 정치외교학과 교수인 저자는 지난해 2∼8월 펠로십 프로그램을 통해 7개월간 대만 타이베이에 머물며 관찰한 바를 바탕으로 대만 사회를 관통하는 키워드 ‘모범생’을 제시한다. 소란이 없고, 규칙을 중시하며, 성실함이 미덕으로 통하는 사회라는 것이다.
안문석/ 인물과사상사/ 1만9000원 대만과 한국은 비슷한 시기 근대화를 겪었고, 독재자의 유산을 둘러싼 평가가 엇갈리며, 저출산과 고령화를 걱정하는 점까지 닮은 곳이 많다. 생활 수준까지 비슷해 저자는 “가끔 여기가 서울인가 타이베이인가 헷갈릴 정도”였다고 말한다. 그럼에도 그는 대만이 한국과는 다른 결을 지닌 사회라고 느꼈다.

그 차이를 설명하는 말이 ‘범생 사회’다. 거리와 공공장소는 정돈돼 있고, 사람들은 차분하다. 웬만한 일은 숫자와 문자로 명확히 하려 하며, 성실하고 근면한 태도가 존중받는다. 이런 문화가 대만 경제의 안정성을 떠받치고 있다는 것이 저자의 시각이다. 세계 최고 수준의 반도체 기업 TSMC 역시 성실한 인재를 선발하고, 그 노고에 합당한 보상을 제공하는 구조 속에서 성장했다는 설명이다.

저자는 대만을 “성실하게 일하는 소시민이 살아가기 좋은 나라”로 묘사한다. 실업률은 낮고, 건강보험과 치안이 안정적이며, 근면하게 일한 사람이라면 연금으로 노후를 꾸리는 데 큰 어려움이 없다는 것이다. 다만 이러한 평가는 저자 자신도 인정하듯, 짧은 체류 기간의 인상과 경험에 기반을 둔 주마간산식 관찰의 결과물이다. 흥미로운 대목은 이처럼 질서와 성실을 중시하는 사회에서 아시아 최초로 동성 결혼이 법제화되고, 미성년자 성전환 수술이 허용되며, 양심적 병역거부가 인정된다는 점이다. 오드리 탕 같은 인물은 어떤가. 유교적 전통이 짙은 대만에서 30대 트랜스젠더가 IT(정보기술) 장관으로 중용되고, 급진적으로 보이는 제도 개혁이 정착한 현실은 저자에게 인상적인 대비로 다가왔다. 그는 이러한 배경을 대만이 일찍부터 다양한 문명을 접하며 형성한 역사적 개방성과 융통성에서 찾는다.

한편 저자는 대만 정치만큼은 유독 소란스럽다고 말한다. 민주화 수준은 높지만 시민사회는 아직 충분히 성숙하지 못했고, 반중이냐 친중이냐를 둘러싸고 정당정치는 극심하게 양극화돼 있다. 국회에서 이따금 정치인들이 벌이는 난투극은 일상의 차분함과 뚜렷한 괴리를 이룬다. 이에 대해 저자는 “시야가 좁고 눈앞의 이익에 매몰된 협량한 범생들이 정치를 하다 보니 생기는 현상”이라고 주장한다.

이 책은 대만 사회를 날카롭게 해부하는 사회과학서라기보다, 한 명의 학자가 현장에서 보고 느낀 인상을 풀어낸 체류기에 가깝다. ‘범생 사회’라는 비유는 대만을 단정하는 만능열쇠는 아니지만, 그 사회를 들여다보는 하나의 단서가 될 수는 있을 것이다.

이규희 기자 lkh@segye.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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